남편이 남긴 유서엔 '남아서 자식교육 잘해 주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승 15명, 판서 35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집중적으로 배출해 최고의 가문으로 위치를 굳혔다. 때로는 당쟁의 와중에서 서인(西人)중 노론(老論)에 속해 몇 차례의 사화(士禍)에서 사약을 받는 등 영화와 비운이 엇갈리기도 했지만 약 100년 동안 왕권보다 강한 세도정치를 해왔다.
남편 김수항은 관리의 선발을 맡은 이조의 책임을 10여 년이나 맡았으나 집안이 물처럼 깨끗해 한 사람의 잡인도 묵은 적이 없으니 안방 살림을 아주 깨끗이 처리했던 나씨의 덕이라 할 수 있었다.
김수항이 끊임없이 승진해 정승의 지위에까지 오르자 살얼음을 밟듯이 두려워하고 처신을 더욱 신중하게 하고자 노력하며 살았다.
김수항은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되는 기사환국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인현왕후가 다시 중전으로 등극하는 갑술환국으로 가문이 복권된다. 이후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은 영의정의 자리에 올라 명문가의 명맥을 이어간다.
억울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담담하고 반듯하게 자식들에게 가르침을 남겼다. 세상을 원망하기는커녕 자식의 공부 걱정을 앞세웠고, 바른 마음가짐으로 진실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죄인으로 죽으면서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 부끄러움이 없다고 토로하는 아버지의 당당한 선언은 자식들에게 든든한 자부심이 되어주었다.

남편의 유서를 품에 지니고 살던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던 남편 김수항이 써준 결별의 글은 관에 함께 넣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에 김수항과 안정라씨 합장묘가 있다.
자식이 잘못된 길을 가면 따끔한 편지를 써서 격렬하게 나무라고, 벼슬길에 나서면 그에 따른 이런저런 당부를 꼼꼼히 적어주었다. 그때는 이렇게 글로 써서 남겼는데 지금은 이런 글을 쓰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정교육이 먼저 가문을 세우고 나아가서는 사회와 국가의 훌륭한 인재를 만드는 산실인 것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의 자녀교육은 아이들 교육에 대한 절망이 넘쳐나는 오늘날에 의미 있는 해법을 준다.
<안정라씨 문중인물>
라식(羅湜 :1498 ~1546)
라식은 증(贈)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치의 시비에 대한 언론활동및 백관규찰하던 사헌부의 정5품) 라세걸(羅世傑)의 2남이다. 호는 장음정(長吟亭)으로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기묘명현) 문하에서 수학해 성리학(性理學)에 전심(專心)했다.
1534년(중종.29년) 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해 선릉참봉(宣陵參:종9품)에 제수됐다. 그러나 日暮滄江上 天寒水自波 孤舟宜早泊 風浪野應多>
즉 (해 저문 창강 위에 하늘은 차갑고 물결만 절로 일렁이네, 외로운 배는 의당 빨리 정박해야 하니, 풍랑은 밤이면 더욱 많아질 것일까)란 시(詩)를 남기고, 1545년(명종1)에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돼, 흥양(興陽)으로 유배됐다가 강계(江界)로 이배되고, 1546년(명종 2년 병오년)에 사사됐다. 선조 3년(庚午年)에 신원복관(伸寃復官:억울함이 풀리고 관작도 복관됨)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