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세이난전쟁 관군사령관 다니다데키 동상
세이난전쟁 관군사령관 다니다데키 동상

[금강일보] 구마모토시는 시내 중심을 시라카와(白川)가 가로질러 흐르는데, 나고야성, 오사카성과 함께 ‘일본 3대 성’의 하나로 꼽히는 구마모토성(熊本城)은 강북에 있다. 강 남쪽의 번화한 도심과 달리 강북 지역은 숲과 나무가 울창하여 공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구마모토성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세 명의 선봉장 중 제2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귀환한 가토 기요마사(加?淸正)가 귀환 후 대이묘(大名)이 되자, 원래의 성을 헐고 1601년부터 1607년까지 7년에 걸쳐 쌓은 성이다.

가토 신사
가토 신사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공격하여 조선인 6만여 명을 학살한 원수이지만, 일본인들은 그를 ‘구마모토의 영웅’ 혹은 ‘구마모토의 신’으로 추앙하고 있다. 가토는 조명연합군에 쫓긴 왜군 1만 6000여 명이 울산왜성(蔚山倭城)에 포위되어 식량이 바닥나자, 타고 다니던 말까지 잡아서 그 피와 고기를 먹으며 연명하다가 간신히 탈출했던 경험을 잊지 않고 울산에 쌓았던 왜성과 똑같은 구조로 쌓았다고 한다. 또 비상시에 대비하여 성 안에 우물 120개를 파는 이외에 고구마와 감자를 많이 심고, 비상식량으로 성 안의 수많은 건물의 방바닥에 까는 다다미도 지푸라기 대신 말린 고구마 줄기로 만들도록 했다. 그뿐만 아니라 비상식량으로 은행을 채취하려고 은행나무를 많이 심어서 은행나무성(銀杏城)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가토는 조선에서 귀환할 때 울산 지역의 조선인 수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가서 구마모토성 축성에 노예처럼 부려 먹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비를 위하여 지은 개인 사찰인 혼묘지(本妙寺) 건축에도 동원했다. 혼묘지로 가는 길가에 울산 마을(蔚山町), 고려문(高麗門) 등 조선인의 포로수용소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성을 쌓을 때 조선에서 납치해간 수많은 조선인 축성기술자 중 일본에 귀화한 유타 시게히로(湯田榮弘)를 성을 쌓은 공적으로 가토 신사의 우두머리인 명예 궁사(宮司)로 임명하기도 했으니, 우리 민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이자 원한의 장소이다.

복원된 구마모토성
복원된 구마모토성

구마모토성은 시내 어디서건 쉽게 눈에 띄어서 걸어서 갈 수 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면 JR 구마모토역에서 노면 전차를 타고 구마모토조마에(熊本城前)에서 내린 뒤 걸어서 5분 거리이다. 지진이 많은 일본에서는 지하철이 발달하지 못하고, 서울에는 1960년대 말 사라진 노면 전차가 주요교통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구마모토교통센터에서도 도보로 5분 거리이다.

성 입구 길 건너편에는 구마모토현 가정법원 청사가 있고, 성의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함락시키고 주민 6만여 명을 학살한 전쟁의 원흉인 가토의 동상이 있다. 입장료는 500엔이지만, 2016년 4월 진도 6.6. 지진으로 돌담 6개소, 성벽 100여m가 무너지고 천수각도 보수공사 중이어서 입장료는 받지 않았다.

보수 중인 천수각
보수 중인 천수각

넓고 깊은 해자로 에워싼 구마모토성은 도요토미가 쌓은 오사카성이나 나고야성보다 웅장한데, 성 둘레는 5.3㎞나 된다. 성에는 혼마루 니노마루 이외에 성문 29개소, 성루 49개소 등의 건물을 세웠고, 가토를 숭배하는 가토 신사(神社)도 있다. 이렇게 웅장하고 견고하게 쌓은 구마모토성은 1877년 세이난 전쟁(西南戰爭: 西南の役) 때 진가를 발휘하여 난공불락의 성인 무샤가에시(武者返し)라 하여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세이난 전쟁은 메이지 유신의 일등 공신으로서 조선 침략을 주장하는 정한론자인 규슈 남부의 사쓰마번(薩摩藩) 번주 사이코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제 뜻이 관철되지 않자, 시노하라 쿠니모토(篠原國幹), 무라타 신하치(村田新八), 기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 등과 일으킨 반란이다. 사이코 다가모리가 사무라이 1만 3000여 명을 이끌고 구마모토성을 공격하자, 규슈 각지에서 가세한 병력이 3만으로 늘어났다. 이에 맞선 구마모토성의 방어군사령관 다니 다데키(谷干城)는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구마모토성에 의지하며 혼슈에서 정규군이 지원할 때까지 55일 동안 방어했다, 그 후 구마모토성의 해자 위에 병풍처럼 깎아지른 성벽 240m를 나가베이(長?)라고 하는데, 세이난 전쟁은 일본에서 벌어진 최후의 내전으로서 일본에서 사무라이 계급이 몰락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성에서 가까운 다카기공원에는 세이난 전쟁 때 싸운 관군 지휘관 다니 다테기의 동상이 왼편에, 오른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는 사이코 다카모리 등 5인의 사무라이 동상이 있다. 얼핏 우리의 4·19혁명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생각나게 한다.(사이코 다카모리에 관하여는 2021. 1. 6. 나가사키시립박물관 참조)

지진으로 인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철제구조물.
지진으로 인한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철제구조물.
지진으로 무너진 성벽 잔해
지진으로 무너진 성벽 잔해

성 안에는 혼마루·니노마루는 물론 가토 신사까지 연륜을 알 수 없을 만큼의 고목인 벚나무가 가득한 숲속의 공원 같은데, 이곳은 ‘일본의 벚꽃 명소 100선’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세이난 전쟁 때에도 훼손되지 않았던 성벽이 2016년 지진으로 돌담이 6개소 100m, 그리고 성벽 대부분이 심한 균열과 붕괴 우려를 맞았다. 일본에서 어느 성이건 가중 중심인 천수각은 1960년에 콘크리트로 재건하여 시립박물관(市史博物館)으로 이용되고 있다.

시립박물관에는 층마다 역대 구마모토의 역사자료와 함께 성주들의 유품과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 천수각 옆에 있는 우토야구라(宇都櫓)는 다른 지역에 있는 성의 천수각을 능가할 정도로 대규모 성루인데, 목조건물인 우토야구라는 가토가 고니시와 세키가하라 전쟁에서 승리 후 고니시의 영지였던 우토성에서 천수각을 통째로 뜯어온 것이라고 한다.(가토와 고니시의 전투는 2022.1.26. 시마바라성 참조)

구마모토성의 천수각은 대지진으로 복원 중이어서 전체를 돌아볼 수 없고, 니노마루 광장과 가토 신사에서 천수각과 검은색 우투야구라 망루 등을 볼 수 있었다. 성벽은 아직 보수 중이지만, 천수각은 2021년 4월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했다고 한다.

가토 동상
가토 동상
구마모토성 입구
구마모토성 입구

한편, 성의 혼마루 왼편에는 일본인들이 영웅으로 추앙하는 가토를 모신 신사가 따로 있는데, 1867년 메이지 유신 때 이곳에 있던 신사를 혼묘지로 옮겼다가 1962년 다시 위패를 가져왔다. 가토 신사의 사당 왼편에는 조선에서 약탈해온 아치형 돌다리를 ‘큰 북 다리’라는 의미의 태고교(太鼓橋)라는 이름과 함께 임진왜란 때 약탈해왔음을 밝히고 있다. 안내판의 문록의역(文祿の役)이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연호인데, 이 다리를 건너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하여 ‘출세 다리(出世橋)’라는 이름도 곁들여 소개하고 있다. 또, 사당 오른쪽 뒤편에는 가토가 성을 쌓으면서 비상식량을 위해 심었다고 하는 수많은 은행나무 중 한 그루도 고목이 되어 있다. 가토 신사는 구마모토성을 비롯하여 구마모토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멋진 포토존이 되지만, 참고로 구마모토성과 인접해 있는 구마모토 시청 14층에 무료 전망대가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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