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벳푸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
벳푸로 가는 고속도로 휴게소

[금강일보] 2019년 7월부터 무역 갈등으로 두 나라의 빗장이 굳게 닫히기 전까지 일본은 한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외국이었다. 특히 수질이 좋은 온천관광이라면, 오이타현의 벳푸(別府), 유후인(由布院) 온천이 유명해서 인천에서 오이타 공항까지 KAL, T-way, 이스타항공 등이 취항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천과 국내 각 지방 공항에서 규슈 최대의 후쿠오카 공항 노선이 많아서 오이타 공항으로 직행하는 여행객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또, 부산에서 후쿠오카까지 매일 페리가 5~6회 왕복하다가 지금은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막힌 상태다.

후쿠오카에서 벳푸까지는 열차와 버스 노선이 매우 편리한데, 현청 소재지인 오이타 시에서 벳푸까지는 기차로 세 정거장이어서 성수기 때 벳푸에서 호텔이나 료칸을 예약하지 못하면, 오이타에서 숙소를 정하고 벳푸를 찾기도 한다. 후쿠오카에서부터 렌터카를 이용하여 규슈를 일주한 우리는 가고시마를 거쳐 오이타현에 들어갔다.

아부라야 쿠마하치 동상
아부라야 쿠마하치 동상

오이타현 일대는 도요국(豊国)으로 불리다가 7세기 말 부젠국(豊前国)과 분고국(豊後国)으로 나뉘었다. 참고로 쿠니(国)란 수도 교토를 중심으로 전국을 7개 도(道)로 나눈 ‘고키시치도(五畿七道)’라는 율령 체제를 시행할 때, 도 아래의 지방행정 단위 명칭이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국(国)과 주(州)를 똑같이 훈독으로 '쿠니'라고 읽고, 국과 주를 혼용하여 불렀다.

긴린코 호수
긴린코 호수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 1333)부터 분고국의 지배자는 오토모씨(大友氏) 가문이었는데, 1467년 오닌의 난(應仁の亂)으로 교토가 잿더미가 되고, 무로마치 바쿠(室町幕府)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서 추방되어 군웅이 할거하던 전국시대에 오토모 소린(大友宗麟: 1530~1587)은 규슈 북부의 여섯 지역을 지배한 패자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1551년 포르투갈 신부 자비에르에게서 가톨릭 교의와 서양 사정을 들은 뒤, 분고국에 가톨릭 포교를 허용하고 예배당을 세웠다.

그러나 가신들이 완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1562년 불가에 입적하면서 요시시게(大友義鎭)란 본명 대신 소린 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그러나 규슈 남부 최대 세력인 사쓰마번의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와 결전을 앞두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일본 다이묘 중 첫 가톨릭 다이묘가 되었다. 또, 그는 1582년 덴쇼 소년 사절단(天正遣欧少年使節)을 유럽에 보냈는데, 유럽에서는 그가 일본 국왕으로 여길 정도였다. 당시 가톨릭 아시아지역 총책임자였던 이탈리아 출신 알레산드로 발리냐노 (Alessandro Valignano) 신부는 일본인 사제를 양성하여 일본인에 의한 직접 포교 계획을 세우고 로마 교황의 지원을 받으려고 사절단 파견을 추진했다. 발리냐노 신부는 10대 소년 네 명을 선발하여 나가사키를 출발하여 2년 6개월 만에 리스본에 도착했다. 소년들은 리스본의 신트라 왕궁에 초대되어 추기경을 만나고, 마드리드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펠리페 2세의 환대도 받았다. 또, 1585년 3월에는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알현하고, 베네치아·베로나·밀라노 등 여러 도시를 방문하는 등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유후인 시내 전경
유후인 시내 전경

이것은 소년들이 동양에서 최초로 온 종교사절단이라는 점과 함께 유럽 여러 나라며 로마 교황청이 일본에 진출할 욕심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1586년 4월 리스본을 출발하여 1587년 5월 인도 고아에 도착했는데, 고아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590년 7월 나가사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들이 고아에 머무르는 동안 요시시게가 시마즈 요시히사에게 대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의지하다가 죽었다. 또, 가톨릭 박해가 시작되어서 소년들은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 사절 자격으로 입국해야 했다. 소년들은 항해용 지도, 서양악기, 구텐베르크 인쇄기 등을 가지고 와서 일본 최초의 일본어로 성서를 인쇄하는 등 일본 근대화 촉진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가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벌이기 직전이니,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는지 알게 한다.

유후인~벳푸 가는 산길
유후인~벳푸 가는 산길

오이타현에는 4445개의 온천 분출수가 있어서 일본에서도 온천이 가장 많은 온천 도시로 알려져 있다. 매년 국내외에서 4500만 명 이상이 찾는데, 그중에서도 벳푸가 가장 유명하다. 그러나 100℃가 넘는 용출수로 목욕은커녕 빨래도 할 수 없어서 말 그대로 화탕지옥(火湯地獄)이라고 불렸던 벳푸가 온천 도시로 유명하게 된 것은 아부라야 쿠마하치(油屋熊八: 1863~ 1935)의 노력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쌀 경매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여 호텔, 료칸, 버스회사 등을 설립했는데, ‘산은 후지, 바다는 세토나이, 온천은 벳푸’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에 벳푸를 온천 도시로 알렸다. 벳푸역 동쪽 광장에는 ‘벳푸 관광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의 동상이 있다.

벳푸 바다지옥
벳푸 바다지옥

츠루미 다케(鶴見岳: 1375m)와 북쪽의 가란 다케(伽藍岳: 1045m)의 두 화산지대에 둘러싸인 벳푸시는 오이타현 제2의 도시이지만, 인구는 12만 명에 불과하다. 벳푸는 성분이 다른 온천을 8개 지역으로 나눠서 '벳푸 하토(別府八湯)'라고 하는데, 벳푸에서는 매년 4월 벳푸 하토 온천축제를 연다. 벳푸 하토는 ① 벳푸 도심의 다케가와라 온천(竹瓦温泉), ② 유노하나(湯の花)로 유명한 묘반 온천(明礬溫泉), ③ 7대 지옥이 있는 칸나와 온천(鉄輪溫泉), ④ 벳푸 북쪽 산 중턱의 시바세키 온천(紫石溫泉), ⑤ 벳푸만을 바라보며 노천욕을 즐길 수 있는 간카이지 온천(海寺溫泉), ⑥ 해안에서 모래찜질을 즐길 수 있는 카메가와 온천(龜川溫泉), ⑦ 츠루미산 아래에 있는 호리타 온천(堀田溫泉), ⑧ 현대식으로 개조한 하마와키 온천(浜脇溫泉) 등이다. 특히 ② 묘반 온천은 유노하나로 유명하다. 유노하나란 온천의 수증기를 액화한 것으로서 흰 가루 형태의 유노하나를 물에 타면 물이 순식간에 온천수 성분으로 변한다. 이것은 일본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유명하다. 또, ③ 칸나와 온천 지대는 벳푸의 ‘7대 지옥’ 중 일본 ‘국가유명관광지’로 지정된 바다 지옥, 백지 지옥, 용권 지옥 등 세 곳의 지옥 온천이 있다.

피의 지옥
피의 지옥

또, 유후인은 2005년 10월에 오이타 군의 하사마정(町)· 쇼나이정· 유후인정이 합병된 신생 도시로서 주민은 겨우 1만 2000여 명이다. 그러나 유후인은 벳푸·구사쓰에 이어서 일본에서 세 번째로 용출량이 풍부하고, 최근에는 널리 알려진 벳푸에 비하여 때 묻지 않은 온천지역으로 알려지면서 찾는 사람이 많다. 특히 유후인의 긴린코 호수(金鱗湖)는 호수에서 뛰어오른 물고기의 비늘이 석양에 금빛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긴린코라는 지명이 붙여졌는데, 호수 밑바닥에서 냉천과 뜨거운 온천수가 동시에 솟아나 새벽녘에는 자욱한 물안개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서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나가츠성 전경
나가츠성 전경

오이타현에서 오이타, 벳푸에 이어 세 번째 큰 도시인 나카쓰시(中津市)는 주민이 8만 명 정도이지만, 이곳은 1587년 도요토미가 규슈를 정벌한 뒤 구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를 부젠국의 번주로 임명한 고도(古都)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중 한 사람이었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아버지로서 야마쿠니강 하구에 나가쓰성을 쌓았는데, 성 안팎에는 이곳 출신 유명인사의 동상과 기념비가 많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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