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 지역에서 보완하자

[금강일보] 1918년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지번주소’ 제도를 도입하였다. 정(町)같은 일본식 주소체계는 광복 이후에 동(洞)이나 리(里) 등으로 명칭이 바뀌어 1996년 도로명 주소 시범사업이 시작될 때까지 8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00시(군) 00구(면) 00동(리)로 표기되는 지번주소는 오랜 세월 우리 주소문화의 골격을 이루면서 일상에 밀착되었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도시팽창에 더하여 종전 지번주소 체제의 모순과 부작용을 시정하고자 1997년 충남 공주시를 비롯하여 다섯 곳에서 도로명 주소 시범사업이 추진되었고 2010년까지 도로명 주소시설물이 전국에 설치 완료되었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이런 방대한 작업을 완수한 우리나라 행정 역량은 대단하다. 2014년부터 도로명 주소를 전면 시행하였으니 어느새 9년째에 접어들었다.

이제 도로명 주소는 일상에 밀착되어 나름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듯한데 여전히 지번주소가 괄호 속에 병기되거나 필요시 공동주택 이름도 적어 넣는다. 그러다보니 도로명 주소의 온전한 기능발휘가 일정부분 미흡해 보인다. 이제 점차 지번 주소 쓰임새가 줄어들고 있지만 오랜 세월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삶의 애환을 보듬어 온 지번 주소에 대한 아쉬움과 애착은 여전히 남아있다.

예를 들어 한남대학교의 옛 지번주소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오정동 133이었는데 도로명 주소로는 한남로 70으로 바뀌어 오정동이라는 이름은 지워졌다. 오정동행정복지 센터가 운영되고 있어 오정동이라는 행정동 이름은 존속하겠지만 오동나무가 있는 우물과 학식과 인품이 높았던 선비에 얽힌 일화는 사라진다. 지역 유래와 전설 나아가 고유한 토착문화가 그렇지 않아도 거세게 밀려드는 도시화 물결 속에서 소멸되는 느낌이다.

단기간에 새로 획정하고 이름을 붙이려니 부득이했겠지만 전국 모든 길을 도로 폭과 왕복 차선을 기준으로 대로, 로 그리고 길이라는 세 가지 단위로 구분한 것도 아쉬움이 남는다. 길의 폭이 40m 이상이고 왕복 8차로일 경우 어김없이 무슨 대로라는 다소 삭막한 이름으로 불리기 때문이다.

한번 획정된 도로이름을 개편하기가 어렵다면 좀 더 유연하고 지역 정서와 문화를 살린 정감 있는 그 지역 스토리나 인물,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사안 그리고 특산물 같은 유연한 별칭을 만들었으면 한다. 혼란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부 구간을 끊어 이를 기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정식 명칭 이외에 광장이나 산책로에 인상적인 이름을 붙여 도로명 주소체계가 주는 획일적인 무미건조함을 덜어낼 수도 있지 않나 싶다. 이런 작업은 중앙행정 시스템보다는 지자체를 중심으로 밋밋한 길 이름에 따뜻한 별명이나 문화가 담긴 별칭 붙이기 등의 차원이 적절할 수 있다.

프랑스 중동부 작은 중세도시 플라비니-쉬르-오즈랭에 있는 ‘너무 더운’ 길<사진>은 도로 이름의 획일성과 무미건조함을 벗어나 그 고장 문화와 역사, 풍토 그리고 오랜 삶의 뿌리가 소중함을 상징하는 듯 정겹다. 길 이름이 흥미로운 관광자원이 될 법도 하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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