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군 논산서 대규모 결의하고 공주선 일본군과 대전투
지리적으로 충청 의미 크지만 관심 너무 없어 타지역과 대조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군 남접과 북접이 모인 소토산. 조그마한 산봉우리라는 뜻으로 현재 인근에는 학교와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제공
1894년 10월 동학농민혁명군 남접과 북접이 모인 소토산. 조그마한 산봉우리라는 뜻으로 현재 인근에는 학교와 아파트 등이 들어서 있다.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제공

[금강일보 신성재 기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東學)의 인내천(人乃天) 사상이 긴 세월을 뛰어 넘어 금강(錦江) 줄기를 따라 여전히 흐른다. 탐관오리의 수탈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전국의 동학혁명군이 집결해 단일대오를 이룬 장소이자 이들의 피가 흩뿌려진 충청에선 이들의 정신이 계승되고 있다.

총과 활을 피할 수 있다는 궁을부(弓乙符) 부적을 살라먹은 채 죽창으로 일본군 신식무기에 맞서 장렬히 산화했던 동학혁명군의 얼이 충남 공주 우금치(우금티)를 비롯해 논산, 태안, 충북 옥천 등 충청권 곳곳에서 살아 숨쉰다. 하지만 우리는 자랑스러운 충청의 문화유산으로서 이를 어떻게 기념할지를 잊고 살고 있다.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혁명군을 기리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제공
1894년 11월 충남 공주 우금티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과 맞서 싸운 동학농민혁명군을 기리는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제공

10일 우금티기념사업회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군은 호남의 전봉준·서장옥 장군 등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주창했던 남접과 충남·충북 등 호서지방의 해월 최시형 선생을 추종하며 종교적 입장에서 비교적 온건한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했던 북접으로 분류된다. 1차 동학농민 봉기 당시 북접은 참여하지 않았는데 청일전쟁 이후 노골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는 일본의 만행에 분노한 동학농민군이 재봉기를 결의하고 1894년 10월경 논산에 위치한 소토산으로 모였다.

윤여진 논산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 부회장은 “그동안 미온적이던 북접군이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며 동학이 단일대오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남접과 북접이 10여 일 동안 모여 그동안 갈등과 앙금을 떨쳐낸 장소가 바로 논산의 소토산이다. 소토산은 당시 이름이 없었는데 후일의 사가들이 동학농민군이 집결한 ‘조그마한 봉우리다’라 해 소토산이라고 명명했다. 50여 년 전에는 죽은 동학군들의 백골이 나온다고 해서 백골산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논산에는 대략 10만~20만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이 모였고 이들은 곧이어 일본·관군의 연합군과 전국 각지에서 싸웠다. 충청에서는 충남 태안과 홍성, 충북 옥천 등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공주감영을 점령한 뒤 수도인 한양으로 향하기 위해 진군했는데 공주 우금티에 포진한 연합군과 맞부딪친다. 결과는 참혹했다. 연합군의 신식무기 앞에 총·칼을 피한다는 부적을 불태워 먹은 동학군의 소박한 믿음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윤 부회장은 “학살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일방적이었다. 죽창을 든 동학혁명군은 신식무기로 무장한 연합군에 의해 거의 궤멸하다시피 했다”라고 설명했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 관군 연합군에 처참히 진압됐지만 이후 인내천 등 동학의 인본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외세와 봉건제에 맞선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재평가받았다. 2018년 11월 동학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에서 관군과 처음 싸워 이긴 5월 11일이 ‘동학농민혁명 기념일’로 제정됐다.

그러나 전봉준 장군 등 남접이 활약했던 호남에선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며 정치권과 학계에서 활발하게 다뤄지나 북접의 주요활동 무대 중 하나이자 동학농민군이 대동단결해 외세와 봉건세력과 맞서 싸운 충청에선 이들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장기적으로 3·1운동에도 영향을 미치며 대한독립의 시발점이 된 동학농민운동. 이 과정에서 피를 쏟은 동학농민군을 충청은 기려야 하지만 누구도 그 방법을 몰라 조금씩 잊히고 있다.

우금티기념사업회 정선원 이사장은 “1994년에 우금티가 국가 사적지(제387호)로 지정되고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개관했지만 타 지역에 비해 관심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동학농민군의 정신은 독립운동에 이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사적 의미가 큰 만큼 지역사회는 문화유산으로서 동학을 어떻게 기념해야 하는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신성재 기자 ssjreturn1@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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