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아카마신궁 전경

야마구치현(山口県) 시모노세키(下関)의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있는 바닷가에서 길 건너 산기슭에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이 있다. 아카마 신궁은 헤이안 시대에 권력다툼에서 타이라 씨가 미나모토 씨와 7년간의 겐페이 전쟁(源平戰爭)에서 패하자, 타이라 씨의 외손자인 8살의 안토쿠 천황(安德: 재위 1180~1185)이 외할머니 니이노아마(二位尼)와 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죽은 것을 기리며 세운 신사다. 아카마 신궁은 1607년 임진왜란 이후 재개된 조선통신사가 바닷길을 건너 시모노세키에 상륙해서 교토와 도쿄로 갔다가 조선으로 돌아가는 길목인 이곳에서 묵는 숙박지로 이용되었다. 아카마 신궁은 1958년에 용궁 모양의 재건했다.

아카마신궁 표지석
아카마신궁 표지석

일본은 794년 간무 천황이 나라(奈良)에서 헤이안쿄(平安京)로 천도한 이후 약 400년간을 헤이안시대(平安: 794~1185)라고 하는데, 170여 년 동안은 외척인 후지와라씨(藤原氏)가 섭정을 했다. 외척 세도에서 벗어나려고 하던 천황은 1160년 75대 스토쿠 천황(崇德) 때 호겐의 난(保元の乱)과 3년 뒤인 1159년 헤이지의 난(平治の乱)을 거치면서 후지와라씨의 간섭을 배제하게 되었지만, 1179년 두 차례의 내전을 거치는 동안 영향력을 과시한 신흥 무사 집단인 타이라씨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권력의 중심이 귀족계급에서 중하급 무사 계급으로 내려온 것이다.

안토쿠천황과 외할머니상
안토쿠천황과 외할머니상

1180년 타이라씨가 8살 난 외손자를 81대 안토쿠 천황(安德)으로 세우자, 1192년 반대파인 미나모토 씨(源頼氏)가 타이라씨의 독재에 반발하며 반격에 나섰다. 미나모토씨가 황궁인 교토에서 타이라씨를 무너뜨리자 타이라씨는 멀리 규슈로 달아났다. 하지만, 규슈에서도 무사들이 반발하자 타이라씨는 다시 시고쿠로 가서 히코시마(彦島)와 야시마(屋島) 두 섬을 근거지로 삼아 대항했다. 마침내 1189년 5월, 간몬해협의 동쪽 세토나이카이(瀨戶內海)의 단노우라(壇ノ浦)에서 미나모토씨의 700척과 타이라씨의 500척이 겨루는 최후의 결전에서 미나모토씨가 승리했다. 7년간의 지루한 전쟁에서 승리한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1192년 82대 고토바 천황(後鳥羽: 1180~1198)으로부터 세이이타이 쇼군(征夷大將軍) 즉, 쇼군(將軍)으로 임명되어 실권을 장악한 첫 바쿠후가 되어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92~1333)를 세웠다.

수천문
수천문

간몬해협의 옛 포구에서 길 건너 산기슭에 있는 아카마 신궁은 다른 신궁과 달리 유독 붉은색을 많이 사용해서 한눈에 띈다. 일본의 신사·신궁·절 등 건물에 빨간 바탕에 황금색 국화 문양은 신궁(神宮)을 표시하며, 지붕 양쪽 끝에서 황소뿔처럼 마주 보며 휘어진 치미(雉尾)는 바다에서 하마를 잡아먹고 사는 용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화재가 나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일본의 신궁.신사 중에서도 유독 붉은 색깔이 강한 아카마 신궁은 전통적인 류구(琉球) 양식이라고 한다.

본전에서 내다본 수천문
본전에서 내다본 수천문

옛 시모노세키 포구 옆에 조성된 공원에는 조선통신사 상륙비가 있지만, 그 입구에 안토쿠 천황이 외할머니의 치마폭에 싸인 채 얼굴만 빼꼼하게 내밀고 바다로 뛰어들기 전의 모습을 조각한 동상이 있다. 일본인들은 태양신 아마테라스로부터 전해 받은 거울·옥구슬·칼을 천황의 상징인 삼종신기(三種神器)라고 하는데, 거울은 지배자의 절대적 권위를 상징하고, 구슬은 부정한 마귀를 쫓고, 검은 무력을 상징한다. 단노우라 해전이 위기에 직면하자, 니이노아마(二位尼)는 8살의 어린 외손자 안토쿠 천황의 허리에 삼종신기를 묶어준 뒤 “저 바다 밑에 우리가 살 용궁이 있단다.”하며 출렁이는 거친 바다에 뛰어들었다고 한다.(삼종신기에 관하여는 2022.3.23. 기리미사의 가라쿠니다케 참조)

아카마신궁 본전
아카마신궁 본전

아카마 신궁은 입장료가 없다. 신궁 정문에 세운 도리이를 지나 아치형 성문 같은 수천문(水天門)을 지나면, 약간 높은 지대에 신사 본전이 있다. 본전에 오르기 전의 오른쪽 건물은 신사 업무를 주관하는 사무소인데, 그 앞에 신사를 참배하기 전에 손을 깨끗하게 씻는 히사쿠(久キュ)가 있다. 가장 높은 지대에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온통 붉은색으로 단장한 본전 건물은 마치 실내 수영장처럼 물이 가득한 위에 참배로(參拜路)가 있다. 이것은 안토쿠 천황이 바닷속의 용궁으로 간 것을 상징하며, 아카마 신궁을 ‘해신(海神)의 궁전’이라고도 한다.

석탑
석탑

본전의 왼편에는 우리나라 불탑과 달리 돌비석을 차곡차곡 쌓은 것 같은 일본 특유의 석탑(多重塔)이 나란히 세워져 있고, 그 아랫단에 보물관이 있다. 보물관에는 안토쿠 천황 당시의 유물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고, 보물관 옆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호이치(芳一)를 모신 전각이 있다. 전해오는 이야기는 시모노세키의 유명한 악사 호이치가 어느 날 왕 앞에서 연주하도록 초청을 받았는데, 그 왕은 다름 아닌 염라대왕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주지 스님은 저승사자들의 눈에 호이치가 보이지 않도록 호이치의 몸에 불경을 빼꼼하게 적어두었으나, 실수로 호이치의 귀에는 적지 않았다. 그런데, 저승사자들이 호이치를 찾아다니다가 그의 귀만 발견하고 호이치의 귀를 잘라갔다. 그렇게 ‘귀를 잃은 호이치’란 뜻에서 ‘미미나시호이치(耳なし芳一)’라 불리기 시작했다는데, 홀로 유유히 비파를 들고 있는 호이치의의 처량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호이치 스님상
호이치 스님상

미미나시 호이치 전각 옆길로 가면 안토구 천황의 가묘(假墓)와 안토쿠 천황을 위하여 싸우다가 죽은 타이라씨의 일곱 충신 시치모리즈카(七盛塚) 무덤이 있다. 또, 안토쿠 천황의 외할아버지인 타이라씨 후손들의 무덤과 비석이 나란히 있는데, 매년 5월 안토쿠 천황을 기리는 제사를 지낸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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