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에서 무훈(武勳)으로 명성을 떨쳤던 현씨(玄氏)는 조선조에 와서 9세손 현규(玄珪)가 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군수품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인 군자감의 벼슬)을 지내고 고부군수(古阜郡守:종4품수령)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정5품)와 이조정랑(吏曹正郞: 이조의 정랑은 문신의 천거 등 특유의 권한이 부여된 관직으로 정5품 전랑이라고 했음)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현득원(玄得元)은 기절(氣節)이 탁월했다고 하며 효우(孝友) 또한 돈독했는데, 세종때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하고, 1454년 성주목사(星州牧使:정3품 외관직)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단종이 수양대군에 의해 영월로 유배되자 벼슬을 버리고, 아들 현보손(玄寶孫)과 같이 영천의 묵방동으로 돌아와 은거하며, 종신토록 절의(節義: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른 도리를 끝내 지킨다는 뜻)를 지키다가 여생을 마쳤다.
현빈(玄彬)의 아들 현익수(玄翼洙)는 검소한 생활로 청백(淸白)해 처사(處士:조용히 묻혀 사는 선비)로 일컬어졌으며 지릉 참봉(智陵參奉:종9품)에 천거됐으나, 노부모의 봉양을 위해 나가지 않고, 주자학(朱子學:송나라때 주희가 대성한 유학으로 성리학, 송학, 정주학)을 연구했다.
죽창한화(竹窓閑話)에 의하면, 좌참찬(左參贊:의정부 정2품) 현효생(玄孝生)의 아들인 현석규(玄錫圭)가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제천정(濟川亭)에서 여러 왕자(王子)들과 함께 잔치를 베풀고 있는데, 과거를 보려고 몰려든 선비중에 한 선비를 가리키며 불러 오도록 했다. 세조는 그 선비에게 예의를 갖추어 이름과 사는 곳을 묻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누가 이중에 처녀 딸을 둔 이가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먼 길을 오느라 의관(衣冠)이 헤어지고 형용(形容)은 초췌한 그 선비를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세조(世祖)의 사람보는 식견을 알고는, “내 손자 서원군(瑞原君)에게 처녀 딸이 있어 지금 혼인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라고 하니,
세조는 “좋은 사위를 구하려면 이 사람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고, 세조는 “옛날부터 큰 인물은 초야(草野)에서 많이 나왔으니 혼인(婚姻)을 정하기로 하시지요”하며 권했다.
뒤에 서원군(瑞原君)이 그 선비의 집안을 알아보니, 영남지방에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있는 가문이어서 사위를 삼았는데, 그 선비가 바로 현석규(玄錫圭)였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청렴하고 공정하게 정사(政事)를 처리했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정2품 법무장관), 우참찬(右參贊:의정부의 정2품) 등을 역임하면서 왕의 신임을 받았다.
한편 죽창한화(竹窓閑話)는 죽천(竹泉) 이덕형(李德泂:1566∼1645)의 수필집으로, 명사(名士)에 관한 일화(逸話)와 한국 고사(故事) 등을 기술했다. 특히 저자의 선조인 이색(李穡)을 비롯해 한산 이씨(韓山李氏)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풍수지리·복서(卜筮) 등에 관한 설화도 기술했다. 대동야승(大東野乘) 권71에도 수록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