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오사카성

일본 혼슈(本州)는 폭 80㎞, 남북 130㎞로 펼쳐진 간토 산맥(関東山脈)을 기준으로 간토(関東) 지방과 간사이(関西) 지방으로 나누는데, 간사이 지방은 야마도 정권 이래 헤이안 시대까지 10000 년 이상 일본 역사의 중심지로서 우리의 경주 고도와 같다. 간사이 지방 최대도시인 오사카시(大阪)는 도쿄에 이어 일본 제2의 대도시로서 900만 명이 살고 있는데, 오사카의 랜드 마크는 오사카성(大坂城)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정권을 잡은 뒤, 전국에 징발령을 내려서 7년 만에 완공한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은 성을 에워싼 해자(垓字)가 웬만한 강폭인 70~90m나 되었으며, 성벽 곳곳에는 망루를 만들었다. 이중으로 판 해자와 강력한 성벽을 갖춘 일본 제일의 오사카성은 규슈의 구마모도성(熊本城), 나고야성(名古屋城)과 함께 ‘일본의 3대 성(城)’ 중 하나다.

오사카 시내에서 지하철 한큐선(보라색) 다니마치(谷町)센 다니마치욘초메(谷町四丁目) 역에서 하차하여 9번 출구를 나서면, 도보로 약 7분 거리에 오사카성이 있다. 지하철을 타지 않더라도 지하철 출구 대각선 길 건너로 오사카성의 천수각이 한눈에 들어와서 찾아가는 데 불편이 없다. 우리 가족은 나라에서 오사카로 돌아오는 길에 JR 오사카공원역에서 내린 뒤, 지하철 출구에서 곧장 오사카성으로 연결된 고가도로를 통해서 오사카성으로 입장했다.

출신이 미천하여 이름도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떠오르는 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하인으로 일하면서 추운 겨울날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었다가 바치는 충성심으로 병사가 된 이후 승승장구했다. 1582년 노부나가가 심복에게 죽은 뒤 정권을 잡은 히데요시는 간사이 지방의 중심지인 오사카를 자신의 본거지로 삼아 거대한 오사카성을 축성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러나 도요토미가 병사한 뒤 패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15년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를 속여서 해자를 메우게 한 뒤, 오사카성을 파괴했다. 1626년 도쿠가와는 오사카성을 복원했지만, 1665년 벼락으로 성이 무너진 이후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되었다가 1931년에야 오사카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지금처럼 복원(?)되었다. 원래 규모의 20%도 되지 않는 오사카성은 공식 명칭도 매일 아침 시민들이 산책과 운동을 하는 오사카 시민공원이어서 입장료도 없다.

해자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정문(大門)과 사쿠라문(櫻門)에 들어서면, 집채만큼이나 큰 바위로 성을 쌓은 것이 놀랍다. 국내에서는 오사카성이나 구마모토성, 히메지성, 니조성처럼 큼지막한 돌로 성을 쌓은 것을 본 적이 없다.

오사카성 해자
오사카성 해자

정문에서 사쿠라문으로 가는 중간 즉, 바깥쪽 해자와 안쪽 해자 사이의 넓은 잔디밭에는 왕벚나무 600여 그루와 전통 일본식으로 지은 영빈관(迎賓館)이 있는데, 이곳을 니시노마루 정원(西の丸庭園)이라고 한다. 봄에는 벚꽃, 여름에는 철쭉, 가을에는 단풍 등이 철 따라 아름다운데, 벚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은 벚꽃 시즌이 되면 관광명소가 되어서 오사카성 입장료와는 별도로 니시노마루 정원 입장료로 200엔을 받는다.

오사카구시립박물관
오사카구시립박물관

니시노마루 정원에서 올려다보는 오사카성과 천수각(天守閣)의 조망, 그리고 좌우의 넓은 해자를 가득 채운 강물과 오사카 시내 전망은 아주 멋진 포토존이 되고 있다.

천수각 엘리베이터
천수각 엘리베이터

일본의 성곽은 일정한 구획으로 나눈 내부를 마루(丸)라고 하는데, 마루는 주성(本丸)과 주성을 둘러싼 니노마루(二の丸)와 산노마루(三の丸)를 배치했다. 니노마루에는 성주인 다이묘가 살고, 산노마루에는 가신들이 살았지만, 1931년 복원공사는 무너진 성벽과 불탄 천수각뿐이었다. 성안의 넓은 성터에는 구(舊) 오사카 시립박물관 건물이 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이용되고 있다.

일본의 어떤 성이든지 중심인 천수각은 다이묘가 부하들을 지휘하고, 멀리 적을 조망하는 전망대 역할을 했다. 시민공원인 오사카성의 입장료는 무료이지만. 천수각 입장은 관람료 600엔(한화 6500원)을 내야 한다. 그러나 오사카 주유 패스 소지자는 무료입장할 수 있고, 간사이 스루패스 소지자도 100엔을 할인해준다. 중학생 이하는 무료다.(간사이 스루패스에 대하여는 2022. 6. 15. 간사이 여행(1) 참조)

매표창구 오른쪽에 건물 2층 높이쯤 되는 돌계단을 올라가면 오사카성의 천수각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그런데, 천수각은 1931년 원래 5층 목조건물을 외관만 복원했을 뿐, 내부는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짝퉁 건물이다. 관람객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갈 수 있지만, 엘리베이터는 5층까지만 운행되어서 5층부터 8층 전망대까지는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천수각에서 본 시내
천수각에서 본 시내

관람객은 전망대를 둘러본 뒤 내려오면서 각 전시실의 전시물을 관람하거나 반대로 계단으로 올라가면서 각 층의 전시물을 살펴본 뒤 전망대로 갈 수 있다. 2층에서 7층까지 각 전시실에는 도요토미 당시의 전투복과 투구·무기 등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사진 촬영도 가능하지만, 3~4층 전시물은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오사카성의 천수각은 기와지붕의 용마루 선에 금박을 입힌 것이 특징이지만, 여러 번 불탔다가 재건된 건물이어서 축성 이후 한 번도 피해당하지 않아 고색 찬란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효고현의 히메지성(姬路城)과 좋은 비교가 된다.

도요토미는 1598년 8월 후미성(伏見城)에서 병사했다는 것이 공식 기록이지만, 쇼군을 죽은 당일에 장례 절차도 없이 은밀하게 묻었다는 것에 의문을 품고 독살설을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1600년 10월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과 도요토미 세력이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에서 승리한 도쿠가와가 새로운 쇼군이 되고,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는 하나의 다이묘로 전락한 채 오사카성에서 살았다.

천수각에서 본 오사카성 해자
천수각에서 본 오사카성 해자

그래도 히데요리의 존재를 부담스럽게 여긴 도쿠가와는 1614년 히데요리가 역모를 꾸몄다며 20만 대군으로 오사카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도쿠가와의 위세에 눌려 한 명의 다이묘도 지원하지 않자, 히데요리는 금과 은을 풀어서 떠돌던 낭인(牢人) 10만 명의 용병을 모아서 도쿠가와에게 대항했다. 워낙 견고한 오사카성은 한 달 동안 공격해도 함락되지 않자, 도쿠가와는 히데요리에게 상호 간의 의심을 털어내기 위해서 도쿠가와 측에서 오사카성의 바깥쪽 해자를 메울 테니, 히데요리 측은 외곽 구역 성벽을 허물어서 형식적으로 항복하자고 화의를 제의했다.

21세의 젊은 히데요리는 71세의 고령인 이에야스가 곧 죽으면 전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그 제의를 받아들였지만, 이것은 도쿠가와의 속임수로서 도쿠가와는 자신이 메우기로 약속한 바깥쪽 해자 외에 안쪽 해자까지 몽땅 메워버리고, 외곽 성벽까지 허물어버렸다. 결국 이에 반발한 히데요리와 1615년 5월에 전투가 재개됐는데, 해자와 외성이 사라진 오사카성은 전투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함락되었다. 권력을 둘러싼 정치는 이렇게 속고 속이는 관계여서 히데요리 모자는 자살했고, 도쿠가와는 도요토미가 쌓은 오사카성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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