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정승 이원익 선생 종택

▲ 오리 선생 종택에서 관감당으로 가는 문. 사진=이규식

“경기는 근본이 되는 곳으로 도리가 남을 돌보아야 할 것인데, 이런 때에 신을 위하여 집을 지으니, 이것도 백성의 원망을 받는 한 가지입니다.” 인조 임금이 집을 하사하려 할 때 이원익 정승이 사양하며 한 말로 전해진다.

조선 중기 선조, 광해군 그리고 인조 치하에서 여러 차례 영의정을 역임한 오리 이원익(1547~1634) 선생은 청빈하게 살아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분이다. 여섯 차례 영의정과 숱한 관직을 맡았음에도 비가 새는 두 칸짜리 누옥에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임금이 집을 하사한 일보다 노년에 이르도록 관직에서 떠나지 못하고 정무를 담당하여 이를 치하하는 궤장을 받은 기록이 당사자에게는 더 영광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사궤장(賜机杖). 공헌이 많은 신하에게 임금이 내려주는 지팡이와 책상이다, 관직을 맡은 사람으로서 최고의 영예로 꼽힌다. 어린 시절 자주 하던 전통 유희였던 종경도(從卿圖)놀이가 떠오른다.

종정도 또는 승정도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조선시대에 즐기던 실내 놀이의 하나로 기름을 빳빳하게 먹인 넓은 한지에 벼슬 명칭을 품계와 종류별로 촘촘하게 적어 놓고, 알이나 각진 나무를 굴려서 나온 끗수에 따라 내외관직 여러 벼슬을 오르내리면서 영의정에 오르거나 귀양을 가가도 하고 여차하면 사약(賜藥)을 받기도 하는 예측불허의 게임이다. 영의정보다 더 부러운 대목이 바로 사궤장으로 임금으로부터 공로를 치하하는 물품을 받는 영광은 예삿일이 아닌 까닭이다.

사궤장의 주인공 오리(梧里) 이원익 선생은 임진왜란 이후 피폐해진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던 혁신적 공물 납부 방법인 대동법을 주장하여 시행하였다. 지역특산물로 세금을 내던 공납의 여러 폐단을 막고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대동법은 토지면적에 비례하여 쌀로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으로 광해군에게 건의하여 먼저 경기지역에서 실시하였다.

빈민구제, 농업장려, 병역제도 개선 같은 내정과 함께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같은 국란시기에는 왕을 보위하는 임무에 충실하였다.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되어 4년 후 귀향하고 그 후 다시 영의정을 맡게 되었다. 23세에 급제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84세에 완전히 물러나 귀향하여 몇 년 뒤 세상을 떠났는데 선생의 삶과 치적은 조선 중기 사회문화사의 상당부분을 대문자로 장식하는 듯하다.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오리 이원익 종택은 선생의 10대 후손이 지었는데 100년이 넘은 안채는 여전히 청백리 재상의 기품과 격조가 스며나는 듯하였다. 종택과 인조가 하사한 집 관감당, 영정이 보관된 사당 오리영우 등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주변 빌라촌에 둘러싸인 채 400년 전, 빈한하지만 청렴하게 오랜 세월 올곧게 나랏일을 담당했던 선비의 기개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도 청렴하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는 공무원들을 선발하여 청백리 포상을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 청백리 선발 과정은 훨씬 다면적이고 엄격한 검증절차를 거쳤다고 기록에는 전한다. 직책수행 능력은 물론 청렴 근검 경효 인품측면의 도덕성을 두루 갖추어 그야말로 전인(全人)에 부합하는 인물을 골랐으므로 본인은 물론 후손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누리는 영예의 후광은 컸을 것이다.

맹사성, 황희, 이황, 이항복, 이이, 김장생 그리고 이원익 선생 같은 청백리 선현들을 귀감삼아 특히 고위 공직자들의 분발과 높은 사명감을 당부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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