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일본 중세부터 근세까지 1100년간 수도였던 교토 시내에 있는 교토국립박물관은 원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한 뒤, 1595년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를 능가하는 사찰 호코지(方広寺)를 세웠던 곳이다.
그런데, 이듬해 호코지가 대지진으로 붕괴하자 1612년 도요토미의 아들 히데요리가 그곳에 다시 대불전(大佛殿)을 지었는데, 이때 도쿠가와는 주조한 범종의 명문(銘文)에서 자신을 모독했다는 구실을 붙여서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히데요리 일족을 몰살시켰다.
그리고 이곳을 천황의 위패를 모신 신사로 만들었다가 신사(神社)와 사찰을 분리하면서 1895년 착공하여 3년 뒤 국립박물관을 준공했다.(자세히는 2022. 10. 5. 교토국립박물관 참조)

교토국립박물관 뒤편 담장 너머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받드는 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는데, 호코지 일대는 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요쿠니 신사 입구인 T자형 거리에서 왼쪽으로 약 100여m 떨어진 주택가 골목에 코 무덤(鼻塚)이 있는데, 이곳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이 전공을 확인하는 증거로 조선인의 코를 베어서 확인받은 뒤 폐기했던 곳이다.
원래 왜군들은 적과 싸울 때 전공의 증거로 적의 목을 베어왔는데,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왜장 오가와치 히데모토(大河秀元)의 조선이야기(朝鮮物語)에 따르면 “조선인 머리 18만 538개, 명나라 사람 머리 2만 9014개 등 21만 4752개를 교토 헤이안성 동쪽 대불전 부근에 묻었다.”고 기록했다.
일본은 수많은 조선인 수급의 운송량을 줄이려고 머리 대신 귀를 잘라서 보내도록 했는데, 전공을 과시하려는 왜장들이 한 사람의 양쪽 귀를 모두 잘라서 바치자 한 사람에게 하나뿐인 코를 베어서 바치도록 바꿨다.

도요토미는 일일이 그 숫자를 센 뒤에 코 영수증을 써주고 감사장을 보냈는데, 왜장들은 더 많은 전공을 인정받으려고 살아있는 조선인의 코까지 마구 베어갔다.
당시 남원지역 의병장 조경남은 난중잡록(亂中雜錄)에서 “왜적은 사람을 보면 죽이건 죽이지 않건 무조건 코를 베어가서 전쟁이 끝난 뒤 거리에서 코 없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라고 썼다.
지금까지 확인된 일본의 코 무덤은 후쿠오카, 쓰시마, 교토에 각각 한군데씩 있고, 오카야마(岡山)에 두 곳 등 모두 5곳인데, 그중 도요쿠니 신사가 있는 교토 히가시야마구(區)의 귀 무덤이 가장 규모가 크다.
1597년 9월 이곳에 조선인의 코와 귀 약 12만 6000여 개를 묻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특히 임진왜란이 끝나기 직전인 1598년 10월 사천 왜성(泗川倭城)에서 웅거하던 왜군 2만 8000명이 조명연합군이 5만 명을 기습공격하여 2만 9000여 명을 죽였다.
당시 전투를 지휘한 왜장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규슈 남부 시마즈의 17대 번주로서 시마즈 가문에 전해오는 시마즈 중흥기(島津中興記)에 의하면, “다다쓰네(島津忠恒) 군대 1만 108명, 요시히로 군대 9520명, 요시히사(島津義久) 군대 8383명 등 2만 8000여 명이 조명연합군 3만 8711명 목을 베고, 그 코를 잘라서 10개 큰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조명연합군의 사체가 40리나 널렸으며, 당시 조명연합군의 전사자는 2만 9000여 명이니, 나머지는 백성의 코를 베었을 것이다. 요시히로는 1597년 7월 거제도 앞바다 칠천량해전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과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을 전멸시키고, 순천왜성에 갇힌 왜장 고니시(小西行長)를 구출해냈다.
또, 1598년 11월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을 물리친 명장이었으며, 철군할 때 남원에서 조선인 도공 박평의, 삼당길 등 80여 명을 끌고 가서 오늘날 ‘심수관 도자기’라는 세계 굴지의 명품을 생산하게 한 주범이었다.(자세히는 2022. 3. 16. 조선인 도공 심수관 참조)

요시히로는 백부 요시히사가 자식이 없어서 그의 양자가 되었고, 요시히로의 3남이 다다쓰네이다. 일본은 칠천량해전, 사천 왜성 전투, 울산왜성 전투를 '임진왜란 3대첩'이라고 하는데, 경남 사천에는 당시 전멸한 조명연합군의 무덤인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있다.
교토의 조선인 귀 무덤은 정유재란 때 경상도 진주 출신 유학자이자 의병장 강항(姜沆:1567~1618)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가 2년 8개월 만에 탈출하여 조선에 처음 알려졌는데, 임진왜란 후 포로송환 협상차 일본에 간 사명대사는 물론 이후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교토에 갈 때마다 이곳을 참배했다.
광해군 17년(1625) 조선통신사 부사 강홍중(姜弘重)도 조선인 이총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코 무덤은 도쿠가와 막부의 참모인 하야시 라잔(林羅山)조차도 ‘사람의 코를 자른다는 것은 지나치게 야만적이다’고 비난하면서 ‘귀 무덤(耳塚)’으로 표기하도록 지시하여 현지에는 일본어와 한글로 각각 '귀 무덤'이라 쓰고, 괄호 안에 '코 무덤'이라고 덧붙여 놓았다.
그런데, 도요토미 신사 옆에 있는 코 무덤은 무덤(塚)이 아니라 왜장들의 전공을 확인한 뒤 폐기한 쓰레기장(?)인데도 마치 정성을 들인 것처럼 무덤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 가소롭다.

주택가 골목에 격자형 쇠창살 울타리로 격리되어 있는 귀무덤은 일반인들이 가까이 접근할 수도 없어서 먼발치로만 바라보게 된다. 당연히 입장료도 없다.
폭 약 49m, 높이 9m의 귀 무덤 위에는 높이 약 7.2m의 고린토(五輪塔)라고 하는 석탑이 있는데, 이 탑은 1643년에 그려진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을 정도로 오래된 탑이다. 그런데, 우리의 정서와 달리 봉분 위에 세운 석탑이 거부감을 느끼게 한다.
무덤은 폐허처럼 방치되다가 임진왜란 후 300여 년이 지난 1915년 도요토미를 존경하는 오바타 이와지로(小畑岩次郎)가 봉분을 다듬고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했다고 한다. 1965년 6월 한일 양국이 국교 수립을 했으나, 이후에도 두 나라 정부 어느 쪽에서도 전혀 관리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부끄러운 역사를 감추려고 1968년 무덤과 석탑을 일괄해서 ‘호코지 석루(石塁) 및 석탑(石塔)’이라는 국가사적으로 지정했지만, 전혀 돌보지 않아서 개인이 3대째 자비로 관리하며 매년 10월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인데, 1992년 삼중 스님 등이 ‘귀 무덤’ 근처의 흙을 일부 가져와서 경남 사천의 조명군총 옆에 이총(耳塚)을 만들고 비석을 세웠다.

전남 진도에는 1597년 9월 이순신 장군이 배 13척으로 왜선 133척을 격파한 명량해전에서 죽은 왜군의 시체를 거둬서 묻어준 ‘왜덕산(倭德山) 무덤’이 있는데, 최근 순천 지역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이 귀 무덤에 묻힌 원혼의 국내 봉환을 추진하는 시민운동을 벌이고 있는데,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
흔히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워서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하여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가해자 일본이 피해를 안겨준 과거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정작 가해자는 아무런 반성도 없는 상황에서 피해자 일방의 용서와 화해는 또 하나의 굴종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한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