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원종린 선생을 추억함

#. 우리나라에서 발행되는 문학잡지는 어림잡아 3백 수십 종으로 추산된다. 대형 출판사에서 펴내는 잡지와 재정기반이 튼실한 경우 제외하고는 경영의 어려움이 분명함에도 오늘도 새로운 잡지가 속속 창간되고 있다. 잡지 번창과 함께 시낭송대회 그리고 문학상 역시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문학상의 경우 수천만 원의 상금으로부터 상금이 없는 명목상의 상에 이르기까지 편차가 매우 크다.
원종린 수필문학상은 고 원종린(1923∼2011) 수필가의 문학정신과 올곧은 삶을 현양하여 후학, 제자들이 제정한 문학상으로 대전에 기반을 두고 올해 18회를 시상했다. 20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학연, 지연 등 여러 연고에 일체 얽매이지 않고 예술적 성취도와 문학경륜에 따른 합당한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고 운영위원회 측에서는 자부한다. 언론사나 잡지사, 유명 기관단체가 주관하는 문학상이 아니어서 지명도는 아직 크게 높지 않지만 수필문학계에서 긍정적인 인지도를 확보한 상으로 알려져 있다. 소액의 상금을 내놓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문학상을 문인들 스스로 만드는 사례가 빈번해지는 이즈음의 추세와 대비된다.
#. 2023년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 2024년이면 스무번째 문학상 시상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자신에게는 더없이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품은 우리나라 근현대사 격동기를 살아온 그의 삶과 문학의 연보로 각인되었다.
선생은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서울 휘문 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주오 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엽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조교로 있던 중 중국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는 모의가 탄로나 육군 형무소에 수감, 가혹한 고문을 견뎌냈다. 이 와중에 광복을 맞고 얼마 뒤 풀려난 선생은 이후 공주교대 교수로 정년퇴임하였다.
망명 모의로 수감된 이후 옥중의 고초를 기록한 ‘조선 제22부대 학도병 사건’이라는 글은 당시 정황과 추이를 정확하고 세밀하게 기록한 자료로 남아있다. 그러나 선생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였다. ‘객관적 서류미비’가 사유라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관련 자료를 피해 당사자가 구하여 제출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아쉬운 대목이다. 주무 당국으로서는 국가유공자, 독립수훈자 선정에 있어 자세하고 객관적인 자료를 요구하여 정밀한 심사를 거쳐 확정해야 하겠지만 개별 사안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은 일괄적인 규정적용으로 인한 안타까움이 크다. 사건을 몸소 겪은 여러 분들의 세세한 기록, 당시 정황과 일치하는 객관적인 진술이 신빙성을 갖지 못한다면 앞으로 세월이 지날수록 독립유공자 발굴, 보훈은 더 어려워지지 않을까 싶다.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국가보훈 시스템의 전향적 개선이 필요한 이유이다. 일제가 패망, 철수하면서 그들에게 불리한 서류를 소각 등의 방법으로 급하게 폐기했을 것이라고 생시 원 선생은 짐작했다고 한다.
#. 선생의 수필은 과다한 문학적 수사와 기교, 극적 설정을 배제하고 일상과 사유의 흐름과 성찰을 담담하지만 개성적인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글을 쓸 당시 느낀 인상과 감성이 따뜻하게 전해져 읽히는 그의 수필은 우리 수필문학사에서 독특한 울림을 준다. 작지만 강단 있는 체구, 온유하지만 깊은 심지와 자상한 인품이 원종린 수필문학상을 통해 오래 기억되기를 기대한다.
소박해 보이지만 웅숭깊은 수필작품의 예술성과 문학을 향한 열정 그리고 제자와 후학, 주변사람들에게 베푼 다정하고 세심한 배려와 보살핌을 내년 원종린 선생이 태어난 지 100년을 맞으며 ‘인향만리’(人香萬里)라는 문구에서 실감한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