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이문고등학교 교사

다사다난했던 임인년이 지나가고 2023년 계묘년 검은 토끼의 새해가 밝았다. 계묘년은 육십 간지 중 40번째 해로, 천간의 계(癸)는 검은색을 의미하고 넷째 지지인 묘(卯)는 토끼를 나타낸다. 그럼, 새해를 맞이해 우리 문학 속에 등장하는 토끼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고찰해 본다.

먼저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에 대한 우화이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토끼가 중간에 낮잠을 자다가 거북이에게 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는 자신의 실력만 믿고 자만하고 나태한 인간으로, 거북이는 느리지만 꾸준히 노력하는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인간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요즈음 학생들은 이러한 원래의 교훈을 수용하면서도 다양한 재해석을 통해 사고의 확장을 보여준다. 우선, 뭍에 사는 토끼와 물에 사는 거북의 경주는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며 시합이 성립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적어도 시합은 같은 층위의 것끼리 해야 공정하다고 본다. 조건이 같거나 비슷해야 하고 노력과 능력 발휘의 여부에 따라 승부를 겨루어야 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시합을 시키는 것은 누가 이기든 별 의미가 없고 사회의 가십거리밖에 될 수 없다.

또 토끼가 잠을 잔 것은 육상선수 삼촌이 어린 조카와 달리기하다가 일부러 져주는 것처럼 거북이에게 자신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그랬으리라는 것과 거북이가 잠자는 토끼를 깨우지 않고 간 것은 승리만을 위한 지나친 이기심이 아니냐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래서 빠르고, 많고, 큰 것이 좋고 행복하다는 일반론이 아니라 소소하지만, 나답게 살면서 내가 느끼고 만족해하는 삶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유설화 작가의 ‘슈퍼 거북’과 ‘슈퍼 토끼’는 우리에게 깊은 사색을 하게 한다.

다음은 ‘귀토지설’에서 유래하여 ‘수궁가’를 거쳐 소설로 정착한 ‘토끼전’에 대한 이야기이다. 남해 용왕이 병이 들어 토끼의 간을 먹어야 낫는다고 하자 충성스러운 별주부가 토끼를 속여 용궁으로 데려가지만, 토끼가 간을 육지에 두고 왔다고 꾀를 내어 용왕과 별주부를 속이고 무사히 돌아온다. 고전적 시각으로는 토끼를 중심으로 분수에 넘치는 지나친 사리사욕에 대한 경계와 기지를 통해 위험을 벗어나는 총명함을 강조하고, 별주부를 중심으로는 윗선의 명령이라면 도덕적으로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행에 옮기는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충성심에 초점을 맞춘다.

그런가 하면 이 글이 창작된 당시의 사회상을 우화적 수법으로 풍자한 것으로 본다. 주색에 빠져 병이 들고 백성의 희생을 요구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용왕과 어전에서 싸움만 하는 대신들의 무능력하고 부패한 정치 사회의 모습이다. 따라서 여기의 토끼는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다가 지배층 강자들에게 위협을 받지만 지기로 자신을 보호하며 끝내 승리하는 서민층의 모습이다. 이런 해학과 풍자로 인해 ‘토끼전’은 지금까지도 시, 연극,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과 확장을 거듭하고 있다.
또 토끼의 간에 의미를 부여한 윤동주의 시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윤동주의 ‘간’은 간을 매개로 ‘귀토지설’과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결합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을 위해 불씨를 전한 죄로 평생 독수리에게 간을 파먹히는 존재이고, 토끼는 자기 간을 용왕에게 빼앗길 위기에 처했다가 모면한다. 이런 점에서 프로메테우스와 토끼는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자아 성찰과 자기희생적 의지를 실천하고 있는 시적 화자와 동일시된다. 또한 간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신념이나 가치들 예컨대 생명, 양심, 주체성과도 같은 매우 소중하고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이 시는 일제 강점기의 저항시를 뛰어넘어, 자기희생이 부족하고 간 쓸개도 없는 사람들이 많은 현재 우리들의 삶에 경종을 울린다.

희망차게 맞이하는 새해는 토끼의 기운을 받아 매사에 슬기롭고 지혜로우며 빠르게 대처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나아가 새해에는 모두가 생명, 양심과 같은 소중한 가치를 보호하고 지키며 나답게 살아가는 멋진 삶을 영위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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