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퐁텐 우화시 ‘토끼와 거북이’ 다시 읽기

▲ 일러스트레이션=박경순 작가

#. 부르주아 귀족 집안 출신 프랑스 작가 장 드 라 퐁텐(1621∼1695)은 성소를 느껴 19세에 오라토리오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1년 만에 속세로 나온다. 그 뒤 법학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었고 아버지로부터 삼림치수관이라는 꽤 힘 있는 직위를 1647년에 물려받아 24년간 유지하였다. 이 기간 동안 나름 숲속을 다녔던 기억과 눈썰미가 동물들의 생태와 특징에 대한 지식을 함양시켰을 듯싶다.

기원전 6세기 고대 그리스 시대 이솝 이후 군소장르에 머물던 ‘우화’라는 분야는 라 퐁텐의 관찰 재능과 직관적인 문체로 인기분야로 각광받게 되었다. '우화시'에서는 동물들이 등장하여 인간의 행동, 의식세계를 펼쳐 보인다. 여우는 간계, 사자는 제왕의 권력, 곰은 어리석고 난폭한 힘, 개미는 인색, 고양이는 위선 그리고 늑대는 잔인함 같은 특성을 상징하는데 글을 읽고 난 독자는 자신이 어떤 유형의 동물에 연관되는지를 알아차리게 된다. 직설적인 교훈을 덧붙이지 않아도 스스로 느끼게 만드는 우화의 힘은 강력하다.

#. 동양에서는 12간지, 쥐부터 돼지에 이르는 12동물들이 각기 특징적인 캐릭터로 인간의 개성을 상징하고 관계를 설정하고 있지만 유럽에서는 이솝으로부터 라 퐁텐에 이르는 우화 작품에 등장하는 동물들로 인간의 품성과 언행, 사회적 관계와 역학구도를 그려낸다.

2023년 토끼해, 토끼는 특히 라 퐁텐 ‘우화시’에서 많이 등장하는 편은 아니다. 다른 동물들이 한두 가지 특성으로 뚜렷한 캐릭터를 나타내는 반면 토끼의 경우 다소 복합적이다. 우화시 ‘토끼와 개구리들’에 그려진 토끼 성격은 소심하고 심란해 하면서 겁, 의심, 몽상 등 여러 갈래다. 개구리들이 동면을 하러 물속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나타나자 무서워서 벌벌 떨며 연못으로 숨는다고 오해를 하기도 한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널리 알려진 ‘토끼와 거북이’에 나오는 이미지가 강렬한 탓에 다른 스토리에서의 토끼 이미지는 영향력이 그리 큰 편이 아닌지도 모른다.

토끼와 거북이가 달리기를 하는데 토끼는 자만한 나머지 도중에 잠을 자다가 꾸준히 기어온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는 설정은 그 이후 정형화되어 끈기 있는 성실함이 승리한다는 교훈으로 통용되어 왔다.

#. 원작을 각색하여 울긋불긋 예쁜 그림을 곁들인 어린이용 동화책은 ‘토끼와 거북이’를 제목으로 삼고 어린이들에게 전통적인 교훈을 전달한다. 오랜 기간 이 구도는 당연한 것으로 이해되어왔고 타고난 재능보다 근면성실이 앞선다는 나름의 메시지를 이해시키는 데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이제 21세기 MZ세대를 비롯한 디지털문화 환경에서 성장한 어린이, 청소년 들은 이런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 토끼가 도중에 잠을 자지 않고 그대로 달렸더라면 거북이를 이길 수 있었을까.
- 토끼가 마지막까지 달린 다음에 잠을 잘 수도 있지 않았을까.
- 거북이가 승리하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다른 대회에 출전했다면 거기서도 이길 수 있었을까.
- 객관적인 경기력 데이터가 확연히 차이 나는데 거북이는 왜 그런 무모한 경기에 나섰을까.
- 토끼와 거북이가 뛰는 속도 차이가 분명한데 도대체 토끼는 얼마나 잤기에 거북이에게 졌을까. 많은 동물들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을텐데 잠이 왔을까.
- 거북이가 도중에 잠들어 있는 토끼를 보았다면 깨워서 정정당당한 내기를 해야지 그대로 두고 혼자만 갔으니 온당치 못한 태도 아닌가.

#. 새로운 시대, 토끼와 거북이의 경기와 그 결과에 대한 시각과 평가 역시 이제는 다른 시각으로 새로워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린이들이 어른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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