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바티칸박물관

326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하여 베드로가 묻힌 무덤 위에 세운 바실리카(Basilca) 양식의 베드로 성당은 1200여 년이 지나면서 노후화되자, 르네상스라는 흐름속에서 평소 예술에 관심이 많은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Ⅱ: 1503~1513)는 교황청 권위를 회복하기 위하여 대대적인 증개축을 결심했다. 1506년 교황은 나폴리의 부호이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추기경 올리비에로 카라파의 추천을 받은 브라만테(Bramante: 1444~1514)를 불러서 베드로 성당을 십자형의 형태로 설계하고, 구(舊) 바티칸 궁전의 중심부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교황 인노켄티우스 8세(Innocentius Ⅷ)의 저택과 연결하는 벨베데레 정원 공사를 맡겼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최고로 번영한 도시국가 피렌체 출신인 다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를 불러서 바티칸 궁의 내부와 장식을 맡겼다.
 

미켈란젠로
미켈란젠로

피렌체 인근의 우르비노 출신으로서 건축설계로 유명한 브라만테는 피렌체·밀라노·나폴리 등 유명한 도시국가를 돌아다니며 궁정과 교회, 사제관을 세웠는데, 그는 십자형(✝) 평면에 거대한 돔을 얹은 베드로 성당과 광장에서 성당으로 이어지는 대각선 통로와 오벨리스크를 천국으로 가는 열쇠 모양(Ω)으로 설계했다. 또, 궁전이나 주택의 위층 또는 정원의 높은 곳에 전망용으로 만든 일종의 옥상 노대(露臺)인 벨베데레는 워낙 규모가 크고 건축비가 제대로 조달되지 않아서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피렌체 출신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1521) 때 완공됐다. 피렌체 출신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1521)로부터도 신임을 받은 브라만테는 성 베드로 성당에 묻혔다.

라파엘로
라파엘로

그런데, 기독교의 총본산인 바티칸에서 조금은 낯선 박물관은 1506년 1월, 로마의 콜로세움 경기장 부근의 포도밭에서 라오콘 군상(群像)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시켜서 라오콘 군상을 사들였다. 트로이 전쟁 때 트로이의 예언자 라오콘은 그리스군이 보낸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에 반대했으나, 그때 바다에서 올라온 뱀이 그와 두 아들을 휘감아 죽였다. BC 3세기경에 제작된 라오콘 군상은 뱀에 감겨있는 2명의 아이와 이를 구출하려고 하는 아버지를 그린 높이 1.84m인 조각으로서 바티칸박물관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라오콘 군상은 브라만테가 꾸민 8각형의 벨베데레 정원(Cortile Ottagonale)에 전시되고 있다.

문예부흥기를 맞아 로마 각지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이 발견되자,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다빈치·미켈란젤로보다 어린 라파엘로에게 고대 유물 감독직을 맡기고, 유물의 유실과 파괴를 방지와 각지에서 발굴된 조각의 이미지를 여러 사본으로 판화와 그림으로 제작하도록 했다.
 

팡테온 신전 천정
팡테온 신전 천정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살 때 공방에 들어가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30살 때 이미 밀라노의 지배자에게 토목공사·축성·병기의 설계 및 제조, 회화·조각의 기술에 능숙하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밀라노 주재 프랑스 총독의 초빙으로 루이 12세의 궁정화가 겸 기술자로서 일하다가 1506년 교황 레오 10세의 초청으로 로마로 왔다. 왼손잡이였던 그는 수첩에 기록할 때는 문자를 전부 뒤집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향해서 배열했는데, 그래서 거울에 비치면 정상적인 글씨체가 되어서 경자(鏡字)라고 불렸다. 그의 작품은 그리스도의 세례(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 소장), 수태고지(루브르미술관 소장)와 성(聖) 히에로니무스(바티칸미술관 소장) 등이 있는데, 특히 모나리자(루브르 소장)와 세례자 요한(모두 루브르 소장)이 유명하다.

다빈치보다 23세 어린 미켈란젤로는 석공의 아내였던 유모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조각과 데생에 능했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존경받는 직업을 가질 것을 원했지만, 당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로렌조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15살 난 미켈란젤로를 수양아들로 삼아서 피렌체 궁으로 데려갔다. 미켈란젤로는 어렸을 적에 친구와 싸우다가 코뼈가 부러져서 그 콤플렉스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고, 제자도 두지 않고 홀로 작업했으며, 또 작업하는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등 은둔생활을 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원래 회화 ·조각가였지만, 그를 시기하는 브라만테의 음모로 생전 처음 프레스코(Presco) 기법으로 성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됐다고 한다. 프레스코화는 밑그림을 세밀하게 그릴 수 없다는 불편에도 불구하고 한번 그린 그림은 오랫동안 벽의 일부가 되어 벽의 표면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하루에 그릴 분량을 정확히 알고 작업해야 하며, 한번 그린 그림을 수정하려면 벽면을 뜯어내서 석회를 다시 칠한 뒤 그림을 그려야 하는 단점이 있다.
 

피나정원의 지구 안의 지구
피나정원의 지구 안의 지구

또, 라파엘로는 1508년 말 건축가이자 그의 친척인 브라만테의 소개로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발탁되어 뒤늦게 참가했는데, 그는 화가로서뿐만 아니라 건축가로도 명성을 높였다. 브라만테와 동향인 피렌체 인근의 우르비노에서 궁정화가인 라파엘로의 아버지 조반니 산타(Giovanni Santi)는 궁정화가에 머물렀던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아들을 통해서 이루려고, 여덟 살 때 유명한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의 제자로 보냈다. 그 결과 라파엘로는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마스터(Master) 칭호를 얻었는데, 중세에 마스터는 그 부문의 장인(匠人)이라는 자격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어머니 마기아(Màgia)를 닮아서 미남이었는데, 그가 그린 '스물한 살의 자화상'에서 잘 나타난다. 그는 다빈치, 미켈란젤로와 동시대에 살면서 세 사람 중 가장 어렸지만, 37세로 가장 먼저 죽었다. 그런 그가 르네상스 3대 화가로 추앙받게 된 것은 오로지 바티칸박물관의 2층에 그의 이름을 단 네 개의 '라파엘로의 방(Stanza di Raffaello)' 중 '서명의 방'에 전시된 '아테네 학당' 덕택이다. 그의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바티칸박물관 입장권의 배경이 될 정도였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서 시작된 바티칸 궁 증축공사는 120년만인 1626년 11월 교황 우르반 8세 때 미켈란젤로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준공되었지만, 다빈치·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세 명의 화가의 영향력이 가장 커서 이들을 '르네상스 3대 화가'라고 한다. 교황 율리우스 2세에 의해서 시작된 증축공사는 미켈란젤로가 르네상스식으로 설계했지만, 완공될 때는 바로크 양식이 많이 가미된 모습이었다. 오늘날 로마의 모든 건물은 베드로 성당보다 더 높게 짓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되어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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