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성 베드로가 순교하여 묻힌 무덤터에 세운 베드로 성당 옆에 주교관과 수도원을 지은 것이 오늘날 교황의 거주하는 관저(官邸)인 사도 궁전(바티칸 궁전 혹은 교황궁)이다. 교황 레오 4세(827~844)는 사라센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베드로 성당과 성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일대를 에워싸는 성벽과 망루를 축조하면서 곡물창고와 물탱크 등을 갖추었고, 교황 니콜라이 3세(1277~1280)는 교황궁 북쪽의 포도밭을 매입하고 비좁은 교황궁을 넓히고, 이노센트 8세 때 벨베데레 정원으로 연결했다.
이렇게 베드로 성당의 부속시설로 시작되었던 교황궁은 오랫동안 여러 건물을 만들어 1400개의 방실이 있는데, 그 대부분을 바티칸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티칸박물관은 어른 1인당 17유로(약 2만 3000원), 대학생은 8유로의 입장료를 받지만, 성베드로 성당과 성 시스티나 경당은 무료입장이다.

교황청의 아비뇽 유폐에서 환궁한 이후인 1473년 교황 식스투스 4세(Sixtus Ⅳ)가 기존의 마조레 성당을 헐어내고, 10년에 걸쳐 구약성서에서 기록된 솔로몬의 ‘예루살렘 성전’의 치수를 그대로 본떠서 가로 20m, 세로 40m, 높이 20.73m로 성 시스티나 성당을 지었는데, 성당은 교황의 개인 예배당으로서 교황의 사후 전 세계에서 온 72세 이하의 추기경들이 모여서 새 교황을 선출하는 장소 콘클라베(Conclave)로 유명하다. 이렇게 정비된 성 시스티나 성당을 교황 율리우스 6세가 단장하기 시작했는데, 성당의 네면 벽과 천장에는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Pietro Perugino), 미켈란젤로를 가르쳤던 도메니코 가를란다오(Domenico Ghirlandaio),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등 당시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가득하지만, 성당을 일반에 공개한 이후에는 천재 화가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성당 제대 뒷면 전체에 벽화 ‘최후의 심판’이 가장 인기다.
교황 율리우스 6세는 미켈란젤로(1475~1564)에게 문맹자들에게 기독교를 알기 쉽게 가르치기 위하여 길이 41m, 폭 13m로서 농구장 2개 크기인 800㎡의 거대한 천장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를 그리도록 지시했다. 하느님이 모세를 거쳐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드로에게, 궁극적으로는 지금의 교황에게 최고의 권위를 내렸다는 것을 과정을 설명하는 그림은 미켈란젤로 혼자서 1508년 8월부터 4년 6개월 동안 ① 빛의 창조 ② 우주의 창조 ③ 땅과 물의 분리 ④ 아담의 창조 ⑤ 이브의 창조 ⑥ 원죄와 낙원에서의 추방 ⑦ 노아의 재물 ⑧ 노아의 대홍수 ⑨ 술에 취한 노아 등 9개 장면을 1만 2000개의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그림에는 각각의 테두리가 있어서 마치 성당 천정이 몇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천정은 전체가 둥그스름한 평면이다. 그림 중 왼쪽에 건장하고 아름다운 몸에 비스듬히 누운 남자가 아담이고, 아담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하늘에서 날아오는 한 노인이 하나님이다. 아담을 향해 손을 뻗고 하나님의 시선은 손가락과 손가락의 만남에 집중되어 있지만, 생명을 건네는 집게손가락은 아직 아담의 검지와 닿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왼팔에는 한 여인과 푸토를 감싸고 있는데, 이 여인이 아담의 배우자 이브다.
그런데, 미켈란젤로는 아파트 7층 높이인 22m의 천장에서 작업하는 동안 아무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게 했는데, 교황이 작업 상황을 보려고 하는 것조차 막자 화가 난 교황이 미켈란젤로를 구타했다. 그러자 미켈란젤로는 즉시 짐을 챙겨서 고향 피렌체로 돌아갔는데, 교황이 그에게 사과하면서 설득하여 미켈란젤로는 다시 작업을 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오랫동안 천장을 바라보고 작업하느라 그의 목은 뻣뻣하게 굳었고, 온몸은 물감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피부병이 생기고, 신경통 류머티즘으로 무릎 관절에는 물이 고였다고 한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퇴색한 천지창조는 일본 NHK-TV가 2300만 달러를 지원하여 1981년부터 1994년까지 14년 동안 복원작업으로 450년간의 묵은 때를 벗기는 작업을 했다.
미켈란젤로가 천지창조를 그린 후 22년이 지난 1533년,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Ⅶ)는 이미 60대인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의 제대 뒤에 벽화로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했다.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神曲)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배경으로 삼아 1534년부터 7년 동안 제단 뒤 전체 벽면인 가로세로 14m× 12m에 프레스코 기법으로 인간이 죽은 뒤, 천당과 지옥으로 갈 자를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준엄하게 심판하는 모습이다.

그림 가운데에서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하고, 윗부분은 천당을 나타내고 오른쪽 아래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죄인들로서 그림 속에 그려진 인물은 모두 399명이나 된다. 예수 그리스도 주위의 순교자들은 자신이 처형당했던 칼이나 창 같은 도구를 들고 있는데, 바돌로매는 가죽을 벗겨서 죽어서 자기 피부 가죽을 들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완성하는 동안 자신을 괴롭힌 추기경 다 체세나(Biagio da Cesena)를 당나귀 귀에 뱀이 몸을 휘감고 성기를 깨물고 있는 지옥의 신 미노스로 그리자, 교황은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신으로 표현한 것에 분노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얼굴도 그림 어딘가에 넣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그는 바돌로매의 찢긴 피부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미켈란젤로의 첫 자화상이다. 그림의 오른쪽 아랫부분 지옥에서 천당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을 막는 장면은 자신의 보트를 밀어서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는 저승의 뱃사공 카론(Caron)과 불의 심판관 미노스(Minos)는 단테의 작품인 ‘인페르노’에 나오는 인물이다.
그런데, 최후의 심판은 신성해야 할 교회 제단에 남성의 성기를 노출한 그림이라고 하여 처음부터 외설 논란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마침내 20여 년 뒤인 1564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그림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가리기로 했는데, 이때 미켈란젤로가 죽어서 교황 비오 4세(Pius Ⅳ)는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제자였던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a)에게 노출 부위를 가리도록 했다. 볼테라는 나체의 그림 중 성기 부분을 덧칠하여 가렸는데, 그 후 ‘팬티 재단사(braghettone)’, ‘기저귀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참고로 르네상스 이전의 성화들은 천사들에게 새처럼 날개가 달리고 모두 나체였고, 르네상스기에는 실체적 인간상을 표현한다고 날개를 생략하고 나체로 그린 것이 대세였다. 그렇지만, 성당에서의 나체는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