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폼페이 공공거리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남부는 농업지대이고, 북부는 상공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나뉜다. AD 76년 8월 베수비오산(1277m)의 화산폭발로 1500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불운의 도시 폼페이(Pompeii)는 로마에서 남쪽으로 약 270㎞ 떨어진 해안가 도시다.

로마에서 폼페이는 30분마다 출발하는 기차를 타면 1시간 10분 만에 나폴리에 도착하고, 나폴리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소렌토행 열차로 갈아타고 폼페이역에서 내리면 된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승용차는 고속도로에서 속도제한이 없지만, 대중교통인 버스는 100㎞ 이내로 제한되고, 운전사는 1일 600㎞ 이내를 운행해야 하고, 8시간 이상 휴식을 하는 등의 제약이 있어서 버스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

폼페이 유적지 입구
폼페이 유적지 입구

로마 시내를 벗어나서 약 25㎞쯤 가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와인 산지인 프라스카티(Frascati)가 있고, 이어서 왼편 베네딕토 산(244m) 위로 하얀색 건물이 베네딕트 수도원(Monasty at Mt. St. Benedicto)이다, 12~13세기에 타락하는 기독교의 정화를 주장하던 예수회·프란체스코회. 프레몬트 대회·베네딕토회 등 수도회 중 성 베네딕토(St. Benedicto)가 세운 베네딕트 수도원이 가장 많은 활약을 했고, 또 가장 널리 알려졌다.

폼페이는 BC 8세기 그리스 식민지 에트루리아인들이 바다를 건너 마을을 개척했으나, BC 5세기경 삼니움인들에게 점령되었다. 이런 사실은 에투리아인의 무덤 묘비명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BC 2세기경 로마가 지중해를 지배하기 위하여 남하할 때 바닷가 도시인 폼페이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BC 89년 로마의 장군 술라에게 함락되어 식민지가 되었다. 그렇지만, 지중해 패권을 둘러싼 로마와 카르타고 간의 포에니 전쟁(Punic Wars: BC 264~ 146) 때에도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고, 로마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시 전쟁(BC 91~88) 때도 로마에 저항하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에 복속되어 발전했다.

베스비오화산
베스비오화산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땅속에 묻혔던 폼페이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1592년 폼페이를 가로지르는 운하 건설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베수비오산 화산폭발 때 남동풍이 바람이 불어서 폼페이는 화산재로 뒤덮였지만, 반대쪽인 엘 코프라에는 많은 용암이 흘러내려 약 400여m나 쌓였다고 한다. 폼페이는 갑작스러운 화산폭발로 2만여 명으로 추정되는 시민과 함께 순식간에 화산재에 매몰된 전설의 도시였는데, 베수비오산은 1795년에도 폭발하고, 1944년에도 폭발했다. 폼페이의 본격적인 발굴조사는 1748년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프랑스 보르봉왕조(Bourbon Dy.: 1589~1792) 때부터였고, 1861년 이탈리아가 통일된 이후 비토리오 에마뉘엘 2세 이후 현재까지 약 80%가 발굴되었다. 폼페이는 199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아폴로신전
아폴로신전

폼페이역 광장에서 버스를 내린 뒤, 기차역을 왼편으로 돌아가면 폼페이로 올라가는 길이다. 잡초가 우거진 개골창은 물건을 싣고 내리던 항구로서 토사가 쌓여서 개골창처럼 변했지만, 지명은 폼페이항(Porta Marina)이다. 폼페이 유적지로 입장하려면 이곳 매표소에서 입장료 11유로를 내야 한다. 해자(垓字)를 건너면 폼페이를 둘러쌌던 성벽 아래로 아치형의 두 개의 문이 있는데, 하나는 보행자 통로이고, 다른 하나는 폼페이 항에서 폼페이로 물건을 실어 나르던 마찻길이다.

아폴로상
아폴로상

BC 5세기경 삼니움 시대에 폼페이 도시를 에워싼 성벽은 한 변이 약 2㎞로서 도시에는 7개의 출입문이 있었다고 하지만, 성벽 대부분은 무너진 상태다. 마찻길을 걸어서 산 위로 올라가니, 언덕 위의 완만한 경사지에 펼쳐진 폼페이는 포격을 맞은 것처럼 건물 골격들만 휑하게 남아있다. 우리가 올라온 폭 3m쯤 되는 마찻길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법원과 같은 공공시설이 있던 곳이고, 왼편은 의사당·포럼·아폴로 신전·베누스 신전 ·유피테르 신전 ·도리아식 신전 ·투표장 ·시민회의장 ·시장 ·5개의 목욕탕·극장·체육관· 도량형기 관리소 등 공공시설 유적이 있는 곳이다. 지금의 법원과 같은 법정이 있었다는 넓은 빈터에는 돌기둥만이 휑하고, 도로 왼편은 시민들이 모인 의사당과 광장 터였다.

폼페이는 남아있는 그리스의 아폴론과 아폴론 신전 유적들로 BC 5세기에 그리스의 식민도시로 개발됐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현대 도시처럼 질서정연한 바둑판 모양인 도시 외곽인 오른쪽 맨 끄트머리 부근에 로마 콜로세움경기장 같은 원형경기장도 있다. 공공건물과 개인 주택은 대부분 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인데, 전깃불이 없던 시대여서 천정에 구멍을 뚫어서 채광했다. 또, 고지대였던 탓에 빗물을 받아서 생활용수로 사용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폼페이가 융성하던 때는 우리의 고구려(BC 58), 백제(BC 18), 신라가 정립하던 삼국시대 초기인데, 2000년 전에 도로를 넓은 돌로 포장하고, 도로와 인도 사이에 현대와 같은 하수구까지 만들었다는 것이 놀랍다. 더구나 도로에 줄지어 있는 가게마다 우리네 1950~1960년대 가게마다 빈지문을 끼워서 가게를 닫던 미닫이 홈, 가게의 햇볕을 가리는 차양을 치면서 그 끈을 묶도록 경계석에 구멍을 뚫은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원형경기장
원형경기장
홍등가 춘화
홍등가 춘화
빵가게
빵가게

마찻길을 따라 내려가는 길 왼쪽에는 홍등가 골목을 알리는 남성의 성기 모양을 새긴 문양이 이채로운데, 이런 모습은 트르키예의 고대도시 에페소에서도 익히 보았던 모습이다. 홍등가 골목의 집집마다 욕조와 침대는 물론 프레스코화로 그린 춘화까지 있어서 당시의 성 풍속을 엿볼 수 있다. 또, 작은 골목에는 화산폭발이 갑자기 일어났음을 짐작하게 해주듯이 빵을 굽던 화덕이 그대로 남아있는 빵 가게며, 술집의 테이블 위에 술잔들까지 그대로 있다.

주택가
주택가

홍등가를 나와서 큰길을 따라 공중목욕탕으로 들어가니, 오늘날의 대중목욕탕 같은 넓은 타원형 욕조가 있다. 로마인들은 목욕을 좋아해서 공중목욕탕이 발달했으며, 목욕탕에서 정치를 논하고 온갖 거래도 했다고 한다. 목욕탕 한쪽 공간에 석고(石膏)로 만든 것 같은 인간 모형 2개가 유리관 속에 전시되어 있다.

1860년 폼페이 발굴 당시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Giuseppe Fiorelli) 교수가 사람이 식사하던 식탁과 숟가락들까지 그대로 남아있는데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화산재를 파헤치던 중 뻥뻥 뚫린 공간이 많이 나오자 그런 틈새가 보일 때마다 반죽한 석고를 부었다가 굳은 뒤 파보니 사람의 형상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화산재에 파묻힌 인간이 뜨거운 열기에 숯처럼 타버려서 인체의 부피만큼 빈 곳으로서 미라가 아닌 사람 모양의 석고로서 캐스트(Cast)라고 한다. 캐스트는 사람뿐만 아니라 개. 고양이 같은 동물도 많이 발굴되었는데, 약 80개 정도 발굴된 인간 캐스트들은 대부분은 가까운 나폴리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목욕탕에서 전시하고 있는 2개 중 비만한 남자는 목욕탕 주인이고, 다른 하나는 목욕하다가 벌거벗은 채 죽은 여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폼페이는 산 위에 있는 도시이지만, 커다란 나무도 없어 고작 무너진 건물 그늘에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밖에 없어서 되도록 여름철 여행을 피하거나 양산이나 우산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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