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이탈리아는 면적 30만 1340㎢에 인구는 약 6185만 명이 사는 이탈리아반도의 국가이다. 알프스산맥이 이탈리아의 북부에서 동서로 뻗으면서 국경을 이루고, 한반도의 태백산맥처럼 아펜니노산맥이 이탈리아반도 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국토의 75% 이상이 해발 200~800m의 산악과 구릉지대이다.
로마에서 서북쪽으로 약 230㎞ 떨어진 피렌체(Firenze)는 중세 유럽에서 르네상스 문명의 발상지이자 토스카나주(Toscana)의 주도(州都)로서 인구는 38만 명이다. 토스카나라는 지명은 BC 800년경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Etruria)들의 라틴어 이름에서 유래했는데, 에트루리아인들은 피렌체 도심을 흐르는 아르노강과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강 사이의 모든 영토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남부를 지배한 그리스계 국가들과 싸우면서 점차 쇠퇴해지다가 BC 59년경 율리우스 시저(Julius Caesar)에게 정복되었다. 시저는 아르노강 변에 도시를 건설하고 플로렌티아(Florentia)라고 했는데, 플로렌티아란 라틴어로 ‘꽃’이란 의미이다. 도시 이름을 꽃이라고 붙인 것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에 조성된 도시의 모습이 꽃송이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하고, 또 이 지역에 붉은 꽃이 많이 자생해서 붙여진 지명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피렌체는 오늘날 영어 ‘꽃(Flower)’이란 단어의 기원이 되었다.

14세기 후반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르네상스의 시대적 상황은 1096년 교황 우루비누스 2세의 성지 예루살렘 회복을 요청하는 호소로 1270년까지 약 200년에 걸친 전후 12차례의 십자군 전쟁에서 패배로 교황권이 추락하고, 각국의 수많은 군사의 이동으로 도시의 발달은 흑사병(1353)이 창궐하여 봉건 제도가 붕괴하는 격변기였다. 이때 알프스 너머 북유럽과 교통의 중심지 피렌체를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바람이 크게 불었다.
피렌체가 문예 부흥의 중심이 된 것은 알프스 북부의 여러 나라와 로마로 통하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순례자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음식업이 발달하고, 다양한 문화의 전파가 빨랐다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또, 이탈리아반도는 나폴리와 교황령을 제외한 수많은 도시국가와 소국들로 분열되어 있어서 새로운 영향력을 형성하기에 적합했는데, 피렌체에서 의약품과 은행업으로 큰 부를 이룬 메디치가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었다.
르네상스란 1550년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조르조 바사리(1511~1574)가 ‘예술가 열전’에서 스승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재림’이라 하여 부활(復活)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리나시타(rinascita)를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다. 이 단어를 훗날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1798~1874)가 르네상스(Renaissance)로 번역했고, 1860년 스위스의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기독교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이 모든 것의 척도였던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 시절로 회귀하려고 하는 운동, 즉 인문주의(Humanism)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사실 중세의 끝이 언제인지는 학자마다 의견이 다르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를 적극 후원하고 장려한 메디치가(Medici family)의 실질적 창시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cid)는 1348년 흑사병으로 토스카나 인구의 70% 이상이 죽을 때 약품 판매로 떼돈을 벌었다. 메디치 가문의 이름은 오늘날 ‘약국(Medici= Medicine)’이란 어원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탈리아 북부 지방인 롬바르디아의 부호이자 귀족인 피카르다 부에리와 결혼할 때, 아내가 가져온 결혼지참금으로 은행을 설립한 것이 크게 성공했다. 중세 기독교는 성경(레위기)에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 때는 이자를 받지 말라는 구절로 이자 받는 행위를 금기시하고, 신(神)의 시간에 대하여 돈을 매기는 이자 행위를 죄악으로 여겼지만, 유태인들은 돈의 효용과 가치를 알고 기독교인들이 취급하지 않는 대금업에 종사했다. 교통의 중심지 피렌체에서 여러 나라의 상인들과 교류하게 된 피렌체 상인들은 기독교 규범에 흔들리지 않고 이자를 받아 부를 축적했다. 특히 조바니는 피렌체의 추기경 발다사레 코사(Baldassare Cossa)와 돈독한 관계를 맺은 것이 인연이 되어 그가 교황 요한 23세(1410~ 1415)가 된 후 메디치 은행은 교황청의 지정은행이 되었다. 피렌체의 화폐 플로린(Florin)이 유럽의 기축통화가 될 정도가 되자, 유럽 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들어 피렌체는 더욱 융성해졌다.
1434년 메디치가의 조바니의 장남 코시모 메디치(1389~1464)가 최초로 권력을 잡고, 그는 중세의 풍습에 따라 자기 가문의 수호성인을 의사(醫師) 성인인 성 고스마(Saint Cosmo)와 성 다미아노(Saint Damian)로 정하고, 또 1465년 백합 문장(紋章)도 창안했다. 오늘날에도 피렌체 곳곳에서 여섯 개의 둥근 알약이 그려진 메디치가의 문장을 볼 수 있다. 코시모는 1453년 동로마 제국 멸망 후 망명한 동로마 학자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하며 연구를 도와주어 그리스 고전 문명을 발전시킴과 동시에 건축, 그림, 조각 등 모든 예술의 발전을 후원했다.

먼저, 로마 문명의 본류가 그리스·소아시아 지방으로 옮겨가고 이탈리아가 퇴락하는 사이에 로마 북쪽 지방의 '야만인'들은 자신들이 멸망시킨 로마의 건축 유산을 이어받아 로마네스크 양식을 넘어 고딕(Gothic)이라는 놀라운 구조의 건축양식을 만들었는데, 15세기 초부터 이에 대응하는 르네상스 양식이 발전했다. 즉, 이탈리아인들이 비하하는 의미로 붙인 고딕 양식은 지붕이 뾰족하고 높은 첨탑과 외부로 나와 있는 기둥들, 넓은 스테인드글라스와 높은 천장을 가진 '높이'에 집착하던 건축양식이었지만, 토스카나 지방을 중심으로 건축물의 높이는 낮아도 네모와 같은 안정적인 도형과 그리스·로마식 기둥과 창으로 장식된 벽면, 그리고 건물 가운데 거대한 돔과 그 아래에 넓은 공간을 가진 기하학적인 형태와 비례로 건축의 질서를 중시하는 르네상스 양식이 나타났다, 토스카나 지방에는 십자형 로마네스크 교회의 중심에 팔각형 혹은 둥근 작은 돔이 올라간 양식이 많이 건축되었는데, 대표적인 건물은 브루넬레스코(1377 ~1446)가 지은 피렌체 두오모 성당이 있다.



또,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에 파묻혀있던 회화를 예술의 경지에 올려놓았는데, 초기의 화가로 조토 디 본도네, 마사초, 프라 안젤리코, 보티첼리 등이 있다. 조토는 사실적인 표정의 묘사와 투시.명암 등으로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였고, 마사초는 최초로 원근법에 맞춰서 그림을 그렸다. 안젤리코는 수태고지(受胎告知)를, 보티첼리는 비너스의 탄생 등 그리스의 고전 신화를 주제로 그렸다. 다 빈치(1452~1519), 미켈란젤로(1475~1564), 라파엘로(1483~1520) 등을 르네상스 3대 화가라고 한다.(자세히는 2023. 2. 8. 바티칸 참조)
도나텔로는 조각이라는 장르를 건축에서 독립시켰고, 르네상스 특유의 개성적인 표현과 사실주의에 입각한 가타멜라타 장군의 기마상, 실물 크기의 누드상인 다비드상을 만들었다. 이렇게 메디치가는 단테(1265∼1321)를 비롯하여 브루넬레스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갈릴레오 등을 후원하여 피렌체를 350여 년 동안 르네상스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