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르네상스의 꽃을 피운 도시 피렌체는 이탈리아반도 북부의 중심인 토스카나주(Tuscana)의 주도(州都)다. 토스카나라는 지명은 BC 800년경 원주민인 에트루리아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Etruscus에서 Truscus로 축약되었다가 토스카나로 변했다고 한다. 알프스 북쪽에서 로마로 가는 길목에 있는 피렌체는 순례자들을 상대로 숙박업과 음식업이 발달하여 1152년 도시국가 피렌체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신성로마제국의 가장 남쪽 지역인 피렌체를 비롯하여 도시 키안티(Chianti), 시에나(Siena)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지지파인 기벨린(Ghibelline)과 교황파인 구엘프(Guelph)가 200년 동안 치열하게 싸우다가 15세기에 메디치가에 의해서 이들 지역이 모두 토스카나주로 통합되었다. 키안티에는 기벨린과 엘프가 싸우던 영주들이 70m가 넘는 높은 중세의 고성과 성탑을 72개나 세워서 당시의 격전을 잘 말해준다. 키안티의 산지 미냐노(San Gimignano)는 1990년 UNESCO 세계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은 석회암 지대여서 수질이 매우 나빠서 일찍부터 에트루리아인들이 식수 대신 포도주를 개발했는데, 키안티는 일조량이 풍부한 지중해성 기후로 당도가 높은 포도가 생산되었다. 1180년대부터 포도주를 만들어서 이탈리아 최초의 포도주 생산자로 기네스북에 오른 안티노리(Antinori)를 비롯하여 1385년 지오반니 피에로 디 안티노리(Giovanni di Piero Antinori) 등이 유명하고, 프랑스에 보르도가 있다면 이탈리아에는 토스카나가 있다고 할 정도였다. 또, 유럽에서 로마로 통하는 길목인 피렌체를 거쳐 가는 상인, 순례자들에 의하여 입소문이 나고, 또 15세기 이후 교황들이 즐겨 마시면서 영국 등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한편, 키안티는 1999년 10월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te) 시장이었던 파올로 사투르니니(Paolo Saturnini)가 벌인 슬로시티(Slow City) 운동 발상지로 유명하다. 슬로시티 운동은 과학문물의 발달에 편승한 인간들의 조급한 심리와 행동에 대한 반발로서 느리게 살기(slow movement), 느리게 먹기(slow food)를 주장하여 빠름과 느림, 농촌과 도시의 조화로운 삶을 지키자는 것이다. 슬로시티 운동은 이탈리아어로 '치타슬로(Citta Slow)'로서 딱딱한 껍질 위에 주택과 교회, 사무실 등 건물을 짊어진 달팽이가 더듬이를 느릿느릿 기어가는 것을 심볼로 삼고 있다.
슬로시티는 주민이 5만 명 이하이고, 도시환경과 유기농 식품, 생산과 소비, 전통음식과 보존 운동 등을 종합하여 심사하여 선정하고 있는데, 2023년 현재 세계 33개국 288개 도시가 선정됐다. 우리나라는 2008년 아시아 최초로 전남 신안군의 증도,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 완도군 청산도, 세계 최초로 차 최초 재배지로 알려진 경남 하동군 악양면 등 5개 군이 슬로시티에 가입한 이래 2023년 현재 예산군 대흥면, 남양주 조안면, 전주 한옥마을, 경북 상주시 함창면·이안면·공검면, 청송군 부동면·파천면, 강원도 영월군 김삿갓면, 제천시 수산면 등 17개 지역이 슬로시티에 가입했다.



슬로시티의 실천은 자연환경과 전통문화 보존은 물론 주 2회 휴무, 하루에도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업무를 벗어나 자기 개인의 시간을 갖도록 하고 있다. 그래서 키안티 일대에서는 음식점이나 기념품 가게도 4시 이후에 문을 연다. 키안티 일대는 포도밭과 고성이 즐비한데, 시간에 쫓기듯 살고 있는 로마·나폴리·밀라노·피렌체에서 자연의 삶을 즐기려고 하는 국내외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휴양도시로 유명하다. 대기오염과 소음을 막기 위하여 주민은 물론 여행객들도 마을 입구 공터에 차량을 주차하도록 하고, 지역주민들을 위하여 대형마트 입점 금지, 외지인에게 부동산을 사고팔지도 못하게 하는 등 전통 보존에 노력하고 있다.


콜레 베레토(Colle Bereto)로 들어서면 벨기에 출신 세계적인 조각가 얀 파브르(Jan Fabre)의 작품 ‘구름을 재는 남자(The man measuring the clouds)’ 조각상이 눈길을 끄는데, 국내에도 순회 전시됐던 조각상은 구름과 하늘의 크기를 자로 잴 수 없듯이 자만하지 않고 자연을 존중하며 와인을 만든다는 신념을 표현한 것이다. 또, 키안티는 문예부흥기에 ‘군주론(Il Principe)’을 쓴 마키아벨리(Machiavelli:1469~1527)의 고향이지만, 사실 그의 발자취를 찾아볼 만한 것은 없다. 피렌체에서 법률가였던 부친의 파산으로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던 마키아벨리는 그런 환경이 오히려 당시 전통이던 라틴어 교육과 가톨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혁적이고 독창성을 갖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극단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했던 도미니크회 수사 사보나롤라(Savonarola)가 처형된 후, 1498년 29세 때 피렌체의 제2서기관이 되어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행정관의 비서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1500년 프랑스에서 5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강력한 군주 아래 통합된 국가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귀환한 뒤, 세속권과 교권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에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자 추기경이었다가 교황군 총사령관이 되어 중부 이탈리아에 공국을 세우려고 하던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1475~1507)의 비서관이 되었다. 1503년에 최고 행정관 피에로 디 톰마소 소데리니가 선출되자, 그의 오른팔이 되어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이 수 세기 동안 용병제로 공화국을 방어하던 체제를 개혁하여 징병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격변기이던 1513년 초 반역 음모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출소한 뒤, 메디치가 출신 조반니 데 메디치가 교황 레오 10세에게 자비를 구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팔라초(시뇨리아의 궁전) 출입도 금지되자, 결국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교외의 사유지에 은둔하여 '군주론'과 '로마사론'을 집필했다. 군주론은 목적만 정당하다면 수단은 상관이 없다는 비윤리적 이론으로 인식되어 오랫동안 비난받아왔지만, 정·교 분리의 주장과 함께 권력 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근대 정치학의 초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