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라벤나.

알프스산맥에서 발원하여 이탈리아 북부를 가로질러 동쪽 아드리아해로 빠지는 652㎞의 포강(Po)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긴 강이다. 포강 하구에 있는 도시 라벤나(Ravenna)는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주도(州都)로서 주민은 약 15만 명 정도이지만,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고도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서고트족, 서고트족을 멸망시킨 동고트족, 동고트족을 멸망시킨 동로마 등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지배하면서 이룩한 초기 기독교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다.

라벤나는 나폴리~로마~피렌체로 이어지는 이탈리아에서 북유럽으로 통하는 중심도로에서 벗어나서 대중교통이나 열차를 이용할 때는 교통의 중심지 볼로냐에서 파도바행 기차로 갈아타고. 페라라(Ferrara)에서 다시 지선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페라라 주의 주도(州都) 페라라에서 라벤나까지는 하루 10여 회의 기차가 운행하며, 약 1시간가량 걸리기 때문에 가톨릭 신자들의 성지순례가 아니라면 이곳까지 찾는 여행객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여름 휴양지로 매우 인기 있는 도시인데, 처음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는 피렌체에서 베로나를 거쳐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로 갔지만, 두 번째 여행에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로 남하하면서 몽블랑이 있는 샤모니에서 알프스산맥을 뚫은 11.6㎞의 몽블랑 터널을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베네치아에서 라벤나를 찾아갔다.

모자이크로 만든 이정표.
모자이크로 만든 이정표.
모자이크로 만든 가리발디광장 이정표
모자이크로 만든 가리발디광장 이정표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의 모자이크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의 모자이크

로마는 395년 군인황제 테오도시우스의 사후 공동황제였던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Honorius)가 서로마 황제가 되고, 장남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 황제가 되어 동서로 갈라졌다. 401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425~455)는 수도를 밀라노로 옮겼다가 402년 다시 라벤나로 천도했다. 그러나 476년 9월 로마제국의 프랑크족 출신 용병대장 오도아케르(Odoacer)가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로부터 양위를 받음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다.

당시 로마는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아타나시우파를 정통으로 삼았지만, 동로마는 아리우스파를 신봉했다. 그런데, 서로마를 멸망시킨 프랑크족 클로비스(Clovis: 446~511)가 496년 랭스 대성당(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한 것은 유럽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로마 교황은 클로비스의 유럽 정복을 카톨릭을 전파한다고 이민족의 서유럽 점령을 정당화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흑해 지역에서 활동하던 고트족이 370년경 훈족에게 밀려 남하하면서 동·서 고트족으로 갈라졌다.

동고트족 추장 아틸라(Attila: 434~453)는 수차 동로마를 침공하면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를 괴롭혔으나, 교황에 대한 존경심이 매우 컸던 동고트족 추장 아틸라는 교황 레오 1세(440~461)의 요청을 받고 현재의 오스트리아 동부인 판노니아 지방으로 철수했다. 이 무렵 동고트족의 왕자 테오도리크(Theodoric: 454~526)가 7세 때부터 동로마의 인질로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20여 년 동안 살다가 동고트족의 왕이 되었다. 493년 동고트족의 왕이 된 테오도리크는 동로마 황제의 명령을 받고 라벤나를 침공하여 오도아케르를 죽인 뒤, 라벤나를 수도로 삼고 33년 동안 이탈리아반도를 지배했다.

테오도리크 영묘
테오도리크 영묘
성 아폴리나레인 클라세 성당
성 아폴리나레인 클라세 성당
클라세 아폴리나레
클라세 아폴리나레

테오도리크 왕은 ‘로마제국 황제’가 아닌 '이탈리아 왕'을 자처하면서 라벤나를 자신이 오랫동안 살았던 콘스탄티노플과 똑같은 도시로 변모시키려고 노력하여 라벤나를 ‘작은 콘스탄티노플’이라고도 한다. 그의 사후 이탈리아 왕의 지위는 외손자 아탈라릭(Athallaric)이 승계했으나, 겨우 10세여서 어머니이자 테오도리크의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가 섭정했다.

그러나 534년 아탈라릭이 8년 만에 죽자 아말라순타는 사촌 테오다하두스(Theodahad)와 공동 통치를 했는데,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장군 벨리사리우스(Belisarius)에게 공격을 명하여 540년 라벤나를 점령했다. 이로써 서로마가 패망한 지 100년 만에 동로마가 라벤나에 이탈리아 총독부를 설치하고, 약 20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이렇게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고도이자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서고트족, 서고트족을 멸망시킨 동고트족, 동고트족을 멸망시킨 동로마 등 5세기부터 8세기까지 서유럽의 초기 기독교 문화를 많이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 라벤나에는 다양한 민족의 유적이 많다. 그중 ①430년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Mausoleo di Galla Placidia) ②430년 네오니안 세례당(Neonian Baptistery) ③500년 아리안 세례당(Arian Baptistry) ④500년 대주교 예배당(Archbishop’s Chapel) ⑤500년 성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Basilica di Sant's Apollinare Nuovo) ⑥520년 테오도리크 왕 영묘(Mausoleo di Theodoric) ⑦548년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 ⑧549년 산타폴리나레인 클라세 성당(Basilica di Sant's Appolinare in Classe) 등 8곳이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누오보 성당과 모자이크
누오보 성당과 모자이크
산타비탈레 성당
산타비탈레 성당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영묘(靈廟)는 위인이나 신격화된 인물의 영혼을 모시는 사당(祠堂)이고, 세례당은 기독교 교회와 별개로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건물이다. 라벤나에서 수많은 성당이나 영묘 등을 입장할 때마다 입장권을 사야 하지만, 통합이용권(10.5유로)을 사면 모든 성당을 입장할 수 있다.

문맹자가 많았던 당시에 민중에게 종교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동양에서는 사찰에서 탱화와 벽화를 많이 그렸듯이 서양에서는 모자이크(Mosaic) 그림으로 기독교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헬레니즘 시대 때 처음 시작된 모자이크의 기법의 재료는 유리(glass)였으나, 5세기 이후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 성당의 벽면을 장식한 모자이크는 비잔틴 시대에 가장 발달했다. 이 시대의 도시 라벤나를 ‘모자이크의 도시’라고 하는데, 라벤나는 모자이크의 도시답게 골목마다 표지판도 모두 모자이크이고, 라벤나의 특산품도 모자이크다.

자유 도시로 살아오던 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침략을 받은 후 민족주의가 급성장하여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와 사르데냐 왕 에마뉘엘 2세(Vittorio Emanuele II)에 의하여 통일을 이룩했다. 이탈리아 주요 도시마다 ‘가리발디 장군의 거리’와 동상이 많은데, 라벤나에도 ‘가리발디 광장’이 있다. 가리발디 광장을 지나 성 프란체스코 교회 옆에는 문예부흥의 선구자인 단테의 무덤이 있다.

단테 무덤 입구
단테 무덤 입구

피렌체 출신인 단테는 토스카나 공화국을 통치하는 6인의 정무위원 중 한 사람이었으나, 반대파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단테는 베네치아 등 여러 도시를 방랑하다가 라벤나의 영주 폴렌타(Guido da Polenta)에 의탁하여 살다가 1321년 라벤나에서 죽었다. 그는 이곳에서 향연·신곡 등을 저술했는데, 그의 무덤 앞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등불이 있다. 등불 비용은 단테를 추방했던 피렌체에서 속죄의 의미로 매년 라벤나에 낸다고 했다.(자세히는 2023.6.21. 단테 생가 참조)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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