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혜가 만난 사람]
“우리 속담은 선현들의 지혜가 담긴 명언들이잖아요. 시대와 상황은 많이 달라졌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교훈으로 삼아야 할 말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한 가지 맘에 안 드는 게 있어요.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이에요. 아니, 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돼요? 바르게 가야지요. 바른 길로, 똑바로 가야 되잖아요, 어디를 가든.”
유난히 뜨겁던 여름날 지인이 유튜브 영상을 보내왔다. ‘괴테할머니tv’를 그때 보았다. 회색빛으로 빛나는 단발머리의 원로 학자가 잔디밭 잡초를 맨손으로 뽑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니.’ 감동적이었다. 다른 자료도 찾아보았다. ‘일흔둘 노학자가 홀로 가꾼 1만 제곱미터의 뜰’이라는 KBS 다큐멘터리를 시청하자 관련 영상이 연달아 나왔다.
‘아니, 이분이 그분이라니!’
괴테의 대작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글로 가득 찬 문장의 보물창고이지만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말 한 마디만으로도 엄청난 위로를 받던 시절이 있었다. 이토록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5인분의 노비’를 자처하는 분이 방대한 소설을 우리말로 옮긴 바로 그 번역가라니.
부잣집 정원처럼 잘 가꿔진 드넓은 뜰을 혼자 관리한다는 말에 걱정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경기도 여주로 달려갔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초등학교 때 서울로 홀로 올라가, 이제는 동양인 최초로 ‘괴테 골드메달’을 받을 만큼 세계적인 괴테 전문가로 우뚝 선 전영애(72) 서울대 명예교수가 열서너 살 소녀처럼 고운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민영혜가 만난 사람
1.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이 / 근심에 찬 여러 밤을 / 울며 지새워 보지 않은 이 / 그대들은 알지 못하리 / 천상의 힘들이여”이라는 말이나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 그 어느 구간에서나 바르다”는 글처럼 우리 귀에 익숙한 문장도 여백서원 뒷길에 있었다.
전 교수는 2014년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후 여백서원에서 바른 길을 가려는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동안 괴테전집 24권 모두를 번역하고 싶다는 그는 '괴테 마을'도 조성할 계획이다. “‘소망이란 우리들 안에 들어있는 능력의 예감’이라는 괴테의 말이 사실이라면 괴테 마을이 들어설 여주도 독일 바이마르와 같은 명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괴테가 태어나 어린 시절 살았던 프랑크푸르트 괴테의 집을 본떠서 올여름 완공된 '젊은 괴테의 집'은 도서관과 전시실로 꾸몄다. 1, 2층을 아우르는 테마는 ‘극복.’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괴테가 창조적으로 극복해낸 구체적 방법과, 어려움을 뛰어넘으며 어떻게 솟구쳤는지에 대한 자료들을 볼 수 있다. 그 집은 정식 개관도 하기 전에 문전성시를 이룰 만큼 인기다. 그곳에서 전 교수를 만났다.

여백서원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언제든 내 글을 쓸 방이 하나 필요했다. 낯선 곳 여주에 낡은 집을 구했다. 너무 좋아서 밤 10시고 새벽 2시고 틈만 나면 학교에서부터 2시간 넘는 거리를 달려왔다. 어느 날 덜컥 겁이 났다. 내 다락방을 지키지 못할 상황이 오면 어쩌나. 여차하면 땅과 집을 바꿀 생각으로 건넌 마을에 땅 하나를 샀다. 그 후로 10년 동안 빚을 갚았다.
나 혼자 쓰기에는 넓은 땅이라 여러 사람이 쓸 집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 근처 20평 남짓 되는 집의 전세금을 빼서 서원을 지었다. 2014년이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전우순 선생)의 호를 따서 ‘여백(如白)’이라고 이름 지었지만 세상 모두를 위해 여백(餘白)과 같은 공간으로 쓰이길 바란다.
어린 시절부터 서울에서 독립했다고 들었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 마쳤을 때 아버지가 부르셨다. 서울로 가서 공부하라고 하셔서, 말씀을 따랐다. 중학교도 입학시험이 있던 시대라 일찍 보내신 것 같다. 1년 만에 경기여중 시험에 합격했다. 시골 출신이 서울 명문학교에 입학을 했으니 ‘장학생(長學生)’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요즘 말로 ‘재수생’ 아니냐는 놀림이었다.
시골에서 보내주는 돈이 조금 남으면 매달 책을 샀다. 돈을 쓸 줄 몰랐다. 딴 것도 할 줄 몰라 늘 도서관에 있거나 서점에 있었다. 서울 유학시절 내내 책을 읽고 살았다.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창시절 전영애는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었겠다.
아니, 그렇지 않다. 중고등학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하기 때문에 3학년 때는 정말 열심히 했다. 그 시절 생각이 나, 딸이 고등학교 때 자퇴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 그러라고 하지 못하고 제도권에 머물길 원했다. 딸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들어갔다.
학생들을 들볶지 말아야 한다. 책을 읽혀 인성을 바르게 하고 생각을 키워줘야 한다. 생각이 한창 커야 할 시기에 영어 몇 마디 가르치느라 수준을 낮춰버리는 것이 문제다. 놀 때 놀아야 공부해야할 때 공부하고 싶지 않겠나.
어릴 때 꿈이 무엇이었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어느 날 캔버스 앞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늘색을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다. 몇 십 년 지나 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시상하는 자리에 섰는데 상 받는 작가가, 자기 엄마랑 내가 친구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엄마 말을 전하더라. ‘전영애는 화가가 되고 싶어 했는데 시인이 되고, 나는 시인이 되고 싶었는데 화가가 됐다’고.
그 이야기를 중학교 친구들에게 전했더니 다들 “너 그림 잘 그렸잖아?” 그래서 놀랐다. 그런 말을 진즉 해줬으면 내가 화가가 됐을 건데, 당시에는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40대에 괴테를 다시 만난 건 특별한 인연일까.
괴테의 『서·동 시집』을 독일어로 읽다가 그 책의 편집자들이 마지막에 첨부한 시를 보고 몹시 놀랐다. “나를 울게 두어라! 밤에 에워싸여/ 끝없는 사막에서...”라는 구절인데, 중학 시절에 읽은 시였다.
30〜40년 뒤에도 그 시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해서 ‘시의 힘’을 주제로 독일어 책을 썼다. 그 후로도 같은 주제로 세 권이나 썼으니 내가 받은 감동을 짐작할 수 있을 거다. 어떤 글은 멋있어도 다 잊히는데, 어떤 글을 잊히지 않고 남아 있을까? 오래 남는 것이 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괴테가 전영애의 삶이 된 것 같다
괴테는 에베레스트와 같다. 문학의 종착역이다. 1970년에 작고한 파울 첼란이라는 유대계 독일 시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카프카를 거쳐 40대 중반 무렵 괴테에 빠졌다. 괴테를 조금 더 알고 싶은데 소설을 다 번역할 수 없어 먼저 시를 번역했다. 혼자 공부하느라 다 번역했다.
시를 번역하면서도 책으로 나올 거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2년 지난 뒤에야 시 전집이 나왔다. 괴테란 이름은 압도적이고 어마어마하게 큰 산이지만, 작품을 읽으면 친근하다. 다음으로 괴테 자서전을 번역하면서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젊은 괴테의 집’을 만들게 된 이유는?
지자체들이 졸속으로 다양한 시설을 만드는 게 안타까워 내실 있게 어른들을 위한 도서관을 만들고 싶었다. 거기에 독일에 흩어져 있는 괴테 시설을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려던 생각이 점점 커져 지금의 크기로 확장됐다.
사람이 뜻을 가지면 얼마나 클 수 있는지, 그런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키웠는지, 두 가지 테마를 ‘젊은 괴테의 집’과 ‘괴테 마을’을 통해 보여줄 생각이다. 괴테는 자신을 아주 잘 키운 모범이자 모델이다. 그에게 ‘문인’이라는 타이틀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그는 서거할 때까지 바이마르의 4부 장관이었고, 자연학자, 기상학자였다. 무려 2,500점의 그림에 문집 146권, 편지 2만여 통을 남겼으니 ‘문호’나 ‘거장’이라는 말도 모자라다.

꿈이 커 추진이 쉽지 않았겠다.
여백서원을 짓는 일부터 험난한 과정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에서 동화 같은 일들이 이어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바이마르에서 강연할 때 꿈 이야기를 했는데, 생면부지의 독일인이 봉투를 주었다. 두툼했다. 그 돈으로 파우스트 미니 극장을 만들고, 독일 노부인에게 감사패를 드렸다.
그 패가 자석 역할을 했는지 독지가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10년 전 제자가 사려고 했던 땅을 우연찮게 훨씬 싸게 사게 된 경우도 있고, 몇 번 사양해도 극구 기증 의사를 밝힌 분도 있다. 손에 쥔 돈이 없는데도 땅이 좋아 계약하고 나면 상금을 타고, 만기된 적금이 나오고 마이너스 통장에서 대출이 되고… 아무튼 기적의 연속이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해 달라.
미술관과 공연장, 천문대 등을 갖추어 청소년과 국내외 방문객들이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괴테 마을’을 만들 예정이다. 괴테가 아버지로부터 처음 자립하고 6년을 보낸 집을 곧 지을 예정이다. 바이마르에 있는 그 집을 축소해 지으려고 한다. 10년 뒤의 자기에게 편지 쓰며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도 있다.
20년 전에, 누가 나에게 ‘10년 뒤에 뭐할 거냐’고 물었다. 좋은 책을 읽으며 번역하는 게 내 생활이었는데 ‘그 책들의 후기만이라도 모아 출판하고 싶다’고 답했다. 한번 뱉은 말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후기를 모아 복사를 했다. 그 꿈이 이루어졌다. 젊은 날 한 치 앞이 안 보여 늘 눈앞이 캄캄했지만 최선을 다하며 살았다. 그것이 길을 내는 일인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길이 생겨나고 있었다. 누구나 10년 정도 계획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알고 보니 여백서원은 인문학의 핫 플레이스였다. 매월 두 번 전 교수가 번역한 『파우스트』를 읽는 모임이며, ‘괴테의 집’ 시 낭독회며, 매월 마지막 토요일(월마토)에 열리는 공개 강연 등 각종 행사에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우정’이라는 한옥은 외국 작가들에게 빌려주는데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에서 새로운 역사가 쓰이고 있다.
여백갤러리와 넓은 정원은 첫 전시를 하는 신진 예술가들에게 무료로 제공된다. 이번 전시회에는 53세 이지영 화가의 그림 18점이 전시되어 있다. 50세에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그는 전통적인 화법을 바탕으로 유익한 미생물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여백서원, 공간보다 더 유명한 전영애 교수는 세계적인 독문학자이자 괴테 연구가다. 지금까지 쓰거나 번역한 책만 70여 권인데, 괴테 작품 이외에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시골의사'를 비롯해 파울 첼란, 라이너 쿤체, 크리스타 볼프의 작품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글쓴이 민영혜 씨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 청소년 독서 교육과 진로 코칭, 성인들을 위한 인문 독서 모임을 이끄는 북 큐레이터이자 민주시민의 덕성을 함양하는 문화운동가다. 인문 독서 교육 ‘문학과 서평’ 대표와 ㈔한국청소년체험세상 이사로 일하며 ‘사람이 길’이라는 주제로 매달 한 번씩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