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로마에 이어 이탈리아 제2의 도시이자, 프랑스·오스트리아·스위스 등 북유럽으로 통하는 도로·철도·통신망을 갖춘 도시 밀라노(Milano)는 현재 롬바르디아주(Lombards)의 주도(州都)로서 140만 명이 살고 있는 상공업이 발달한 국제도시다.
이탈리아는 로마를 중심으로 하여 남부와 북부로 나누는데, 나폴리·소렌토 등 로마의 남부는 주로 농업지대이고, 피렌체·밀라노·피사 등 로마의 북부 도시는 상공업이 발달했다. 밀라노는 지리적으로 알프스산맥의 남쪽 사면과 접하고, 반원형의 산지에 싸인 북쪽은 건조지역인데, 포강 가까이 평야지대에 위치하여 이탈리아는 물론 북유럽까지 거미줄처럼 연결된 도로·철도·통신망과 지리적 이점으로 상공업이 발달했다. 이것은 로마가 오랫동안 유럽의 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면서 유럽 각지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해서 일찍부터 교통로와 숙박업이 발달한 것에 기인한다. 밀라노에서는 매년 4월 국제견본무역박람회가 열리고, ‘밀라노 패션쇼’라고 할 정도로 기성복과 유명 디자이너의 패션전시회가 열리는 국제도시로서 국제공항이 두 곳이나 있다.


역사적으로 상징성이 큰 로마가 이탈리아의 행정수도라고 한다면, 밀라노는 이탈리아의 경제수도이다. 밀라노는 런던, 파리, 마드리드에 이은 유럽 4대 경제 도시이기도 한데, 1980년부터 동유럽, 북아프리카, 중남미, 아시아에서 취업근로자와 이민이 많이 늘어나 외국인이 전체 시민의 15%를 차지하고 있다. 막강한 경제력과 정열적인 밀라노 시민들은 AC밀란과 인터 밀란이라는 두 개의 축구팀으로도 유명하다.
베네치아를 거쳐서 밀라노에 도착한 우리 가족은 밀라노의 중심지인 두오모 광장에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밀라노의 주요 명소는 두오모 대성당, 에마뉘엘 갤러리, 스칼라 극장 정도이며, 모두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있다.


밀라노는 원래 현재의 두오모 성당 남서쪽에 도시가 직사각형으로 형성되었는데, 카롤링거 왕조 때 오랜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된 후 1162년 지금과 같은 타원형 도시로 변했다. 밀라노의 랜드 마크인 두오모 성당(Duomo Milan)은 시내 중심에 있을 뿐만 아니라 지하철 두오모 역과 가까워서 찾아가기도 쉽다.
두오모는 이탈리아어로 성당이고. 라틴어로 ‘반구형 지붕’을 뜻하는 도무스(Domus)에서 유래했는데, 특히 11세기부터 200년 동안 서유럽과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 전파된 이슬람 양식으로서 이후 주교좌(主敎座)가 있는 ‘대성당’을 의미했다. 오랫동안 도시국가였던 이탈리아에는 주요 도시마다 ‘두오모 성당’이 있지만, 그중 피렌체 두오모 성당과 밀라노 두오모 성당이 가장 유명하다.
높이 157m, 너비 92m의 대규모인 밀라노 대성당은 1386년 건축을 시작하여 600년에 걸쳐 완성하면서 바로크식, 고딕식, 신 고딕식, 네오로마네스크식 등이 다양하게 혼합되었는데,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과 같은 돔이 없이 135개의 첨탑과 하얀 대리석을 섬세하게 조각이 아름답다. 밀라노 대성당은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런던의 성 폴(바울) 대성당, 피렌체 대성당과 함께 세계에서 4번째 큰 대성당으로서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두오모 성당에 대해서는 2023. 5. 30. 피렌체 두오모 성당 참조)

밀라노 대성당 내부는 다양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섬세한 장식이 아름답지만, 성당 옥상에서 조망하는 전망도 일품이다. 계단으로 옥상을 올라가는 데는 5유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데는 12유로를 내야 한다. 참고로 두오모 광장에서 비둘기 먹이나 팔찌를 공짜로 준다며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들은 나중에 돈을 요구하므로 친절을 냉정하게 거절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밀라노는 BC 5세기에 훈족 아틸라의 침략을 받고, BC 600년경에는 게르만족 일파인 켈트족(Celts)이 도시를 형성했다. 그러나 AD 1세기 로마제국 최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로마에 정복되고, 3세기 군인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제국이 동서로 나누어질 때 밀라노는 서로마의 수도이자 황궁 소재지와 행정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이곳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밀라노칙령을 발표했으며, 402년에 라벤나로 수도가 옮겨질 때까지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자세히는 2023. 8. 23. 라벤나 개요 참조)

그 후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에 의해 파괴당했던 밀라노는 761년 피핀이 프랑크 왕국의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카롤링거 왕조(Carolinger)의 샤를마뉴 때 활기를 되찾았으나, 기독교의 강화로 아리베르토 다 안티미아노(1018~ 1045) 대주교 치하에서 대주교의 정치적 세력과 롬바르디아 도시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오랫동안 전쟁을 계속했다.
밀라노는 게르만족 일파인 랑고바르드족이 이곳에 랑고바르드 왕국(Lombards)을 세움으로써 롬바르디아란 명칭을 갖게 되었는데, 롬바르디 도시동맹의 승리로 대주교의 권위가 실추되고 정치는 자치도시(코뮌)가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가 밀라노를 직접 통치하려고 하였으나, 1167년 격퇴한 후 밀라노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1447년 밀라노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들어서자, 용병대장 출신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필리포의 딸 마리아 비앙카 비스콘티와 결혼하여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군주정으로 회귀했다. 밀라노 공국은 1499년 프랑스 루이 12세가 밀라노 공국의 계승권을 주장하며 침공하여 프랑스령으로 편입되었으나, 곧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아 스포르차 가문이 복귀했다. 1535년 스포르차 가문의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2세가 사망하면서 밀라노 공국은 카를 5세를 거쳐 아들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에게 상속되었다. 1714년까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의 지배를 받던 밀라노는 합스부르크가의 착취가 얼마나 심했는지 1796년 나폴레옹 군이 진격하자 밀라노 시민들은 적국이자 이민족인 프랑스군을 열렬히 환영할 정도였다고 한다.
1805년 나폴레옹은 밀라노를 이탈리아 왕국이 수도로 삼고, 밀라노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814년 나폴레옹 제국이 붕괴하자, 빈(Wine)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게 된 밀라노는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지배 때부터 통일에 대한 민족주의 사상이 커져서 시민 봉기가 일어났다. 사르데냐의 주도로 통일운동으로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중부·북부를 통일하고, 남부에서는 가리발디(Garibaldi: 1807~ 1882)가 시칠리아와 나폴리를 점령하여 에마뉘엘 2세(Vittorio Emanuele II : 1820~1878)에게 바침으로써 1861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이 성립되었다.(비토리오 에마뉘엘 2세에 관해서 2023. 3. 19. 로마 베네치아광장 참조)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