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비엔나 성슈테판 대성당

동쪽으로 헝가리, 서쪽으로 스위스, 북서쪽으로 독일, 북쪽으로 체코, 남서쪽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을 이루고 있는 영어 오스트리아(Austria)는 게르만어로 ‘동쪽의 나라’라는 뜻인 ‘외스트라이히(Österreich)’이다.

오랫동안 신성로마제국으로서 유럽을 호령하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는 1800년 초 나폴레옹의 침략으로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었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 패한 뒤 영토 분할로 수국이 되고, 영세중립국이 되었다. 서유럽국가 중 프랑스와 독일을 제외하고 대부분 국가는 면적도 적고 인구도 1000만 명 안팎이지만, 오스트리아는 남한(10만㎢)보다 작은 8만 3855㎢이다. 그나마 국토의 2/3가 해발 1500∼3000m의 고산지대여서 삼림업과 여름철에도 스키 등 산악 스포츠가 발달했다. 인구는 서울시민보다 적은 900만 명이고, 그중 가톨릭 신자가 85%이다. 문화와 예술이 발달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등 많은 고전음악가를 배출한 오스트리아의 수도는 빈(Wine)이고, 200만 명이 살고 있다.

찰츠부르크 캄마굿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찰츠부르크 캄마굿 전망대에서 바라본 전경

역사적으로 BC 400년경 게르만족의 일파인 켈트족(Celts)이 노리쿰 왕국을 세웠는데, BC 15년경 로마인들이 이곳을 점령했다. 그러나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북유럽에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프랑크족이 세운 국가가 팽창하기 시작하면서 6세기경 바이에른족(Bayern)과 슬라브족인 아바르족(Avar)이 정착했다. 프랑크족이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로마교회와 손을 잡은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742~814)가 이들을 물리치고 카롤링커 왕조(Carolingian: 750~ 887)를 열면서 나라이름을 오스타 마르크(Ostmark: Eastern Mark)라고 했다. 오스트는 동쪽, 마르크는 경계선을 의미하여 ‘동쪽에 있는 지방’이란 의미다.

샤를마뉴 대제는 옛 로마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고. 로마, 라벤나, 토스카나, 코르시카, 롬바르디 등을 교황령으로 바치자, 교황 레오 3세는 800년 크리스마스 때 샤를마뉴 대제에게 서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해주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은 ‘로마제국의 부활'로 간주되었지만, 프랑크 제국은 분할 상속제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나눠지면서 로마제국이란 호칭도 사라졌다.

미라벨 정원
미라벨 정원

10세기 초 샤를마뉴 대제의 혈통인 카롤링거 왕조가 단절되고, 오토 1세(Otto Ⅰ: 936∼973)가 작센 왕조(Saxon: 919~1024)를 열었다. 당시 교회와 수도원은 귀족들의 착취로 매우 피폐했는데, 오토 1세가 귀족들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장려하자 962년 교황 요한 12세는 오토 1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줌으로써 ‘신성로마제국 (Holy Roman Empire)’이 출현했다. 신성로마제국이란 고대 로마의 전통 보존자인 그리스도 교회와 일체라는 뜻에서 신성(神聖)이라는 말을 붙였고, 고대 로마제국의 부활·연장이라고 여겨서 로마제국이라고 했다. 이후 역대 독일국왕은 1806년 나폴레옹 전쟁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는데,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이탈리아 지방의 경영에 집착하여 독일 본토는 제후들의 세력이 커졌다.

신성로마제국 가문인 호헨슈타우펜가(Hohenstaufen: 1138 ~1254)는 외국 왕족과 혼인을 맺는 방식으로 지중해 연안과 시칠리아, 예루살렘까지 지배했지만, 1246년 프리드리히 2세(1212~ 1250)가 헝가리전쟁에서 전사하면서 황제가 없는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 1246∼1273)를 맞게 되었다.

19년 동안 대공위 시대에 제후들은 사실상 독립해나갔고, 1251년 오스트리아 귀족으로 초빙된 보헤미아(뵈면) 왕 오토카르 2세가 빈(Wine)을 점령하면서 황제 지위를 요구하자, 이에 반대한 트리어·마인츠·쾰른 대주교, 작센 공작, 라인의 팔라틴 백작,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보헤미아 왕 등 7명의 선제후(選帝侯)들은 보헤미아 왕 오타카르 2세를 죽였다. 그리고 1273년 지금의 스위스인 슈바벤 지방의 합스부르크 성(하비히츠부르크 성=매의 성)의 보잘것없는 합스부르크 백작 루돌프 1세((Rudolf I: 1273∼1291)를 독일 왕으로 선출했다.

비엔나 게른트너 거리
비엔나 게른트너 거리

합스부르크가(Habsburg 家)는 이후 로마제국 황제와 합스부르크가 최초의 황제가 되었는데, 루돌프 1세는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에게 로마·교황령·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새로운 십자군을 이끈다는 조건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승인받았다. 루돌프 1세의 사후에 신성로마제국은 아들 알브레히트(독일 왕 알브레히트 1세)와 루돌프(오스트리아 왕 루돌프 2세)에게 나눠졌는데, 이때부터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를 600년 동안 지배하게 되었다. 1355년 7월 카를 4세는 교황이 독일 정치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 7명의 선제후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한다는 황금 칙서(Golden Bull)를 성문화했다.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1459~1519)는 1483년부터 1493년까지 아버지와 공동 황제로 있으면서 합스부르크가의 영향력을 유럽 전 지역으로 확산시켰다. 즉, 1477년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 공작 샤를의 상속녀인 마리와 결혼하여 오늘날의 네덜란드·벨기에 지방을 합스부르크가의 영토로 포함했지만, 스위스 지방의 독립을 인정하여 스위스가 떨어져 나갔다. 1496년 그의 아들 필립이 에스파냐 왕녀 후아나와 결혼하여 스페인을 통치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했는데, 훗날 손자인 카를 5세가 카스티야왕국과 아라곤 왕국을 모두 다스리면서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게 됐다.

필립의 장남 카를 5세(1519∼1556)는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5세(Carlo V)라 하고,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Carlos I)라고 불렸는데,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는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시기로서 종교개혁·오스만제국의 유럽 침공, 신대륙 정복,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등 유럽사를 이야기할 때 그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비엔나 모차르트 생가
비엔나 모차르트 생가

17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제프 1세가 죽자, 동생 카를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1711 1740)가 됐으나, 자식이 없자 국사 조칙(Pragmatic sanction)을 발표하여 장자 상속 원칙에서 자식이 없다면 그의 딸이 지위를 넘겨받는다고 했다. 1740년 카를 6세 사후에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즉위자, 제후들이 반발하면서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 1748)’을 벌어졌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황제로 삼고, 자신이 실질적인 황제로서 국정을 총괄했다.

1804년 프란츠 2세가 오스트리아 황제를 자칭하며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였으나, 민족주의 감정으로 1914년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오스트리아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면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