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유일 사액서원이었던 성곡서원
시조 김신(金侁)공은 신라 경순왕의 제4자 은열(殷說)공의 제15세 손으로 자(字)는 윤직, 호(號)는 낙천제(樂天齊)라 하며 고려 고종조에 문과에 급제해 사간원좌정언(司諫院左正言)을 거쳐 원종8년 정묘(丁卯 1267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왕을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원제로부터 정서대원수의 대임을 받아 만노(萬奴)의 여환(余患)을 제하고 또 강서인주적(江西 鱗州賊)을 토평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 요양성참정(金紫光祿大夫 遼陽省參政)에 제수됐다.
원종11년 경오(庚午)에 귀국하니 공이 재원시에 국가를 위해 공헌한 바 크므로 공의 고향인 진예현(進禮縣)을 금주(錦州)로 승격해 금주군(錦州郡: 現錦山)에 봉(封)함으로 본관(本貫)을 금산(錦山)으로 정했다.
계유(癸酉)에 상장군 평장사(平章事)에 임명돼 하절사(賀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오고 갑술(甲戌)에 좌군사(左軍使)로 중군사 김방경(金方慶)과 왜국정벌 (倭國征伐)에 참전했다가 일기도(一岐島)에서 전사(戰死)하니 시호(諡號)를 충간공(忠簡公)이라 하고 칙명(勅命)으로 사당(황풍사)을 세우고 향사(享祀) 하게 해 리명(里名)도 황풍리라 칭한다.
또 무주 유림이 죽계서원에서 향사를 하고 있다.
<성곡서원(星谷書院,1617년(광해군9)설립>
성곡서원은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에 있던 금산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이었으며, 금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지난 1617년(광해군 9)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금산김씨 중흥조 김신(金侁)과 윤택(尹澤).야은 길재(吉再).충암 김정(金淨,기묘명현).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위패를 모셨다.
1663년(현종 4)에 성곡(星谷)이라고 사액돼 원내에 장의(掌議) 2인과 유사(儒士) 2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하지 못하고 지금은 유허지만 남아 있다.
성곡서원의 건립논의는 광해군 즉위 초기인 1613년에 선비들의 요청으로 고려 공민왕 때의 율정 윤택(栗亭 尹澤)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았던 진악산(進樂山) 아래에 당시의 금산군수 이안눌(李安訥,1611.10~1613.11. 재임)이 주도해 창건됐고, 1617년에 군수 김원록(金元錄, 1613.11~1618.1. 재임)에 의해 봉안됐다.
원기(院記)는 김원록이 지었고 제영(題詠)은 이안눌과 서산군수 김대덕(金大德, 1577~1639, 호: 蘇峰·易安堂,김원록의 아들)이 지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 6명은 서원 건립 당시에 배향되는데, 고려말의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 參政)을 역임한 낙천재 김신(樂天齋 金侁), 율정 윤택(栗亭 尹澤), 야은 길재(冶隱 吉再), 기묘사화 때 8현 중의 한사람인 충암 김정(冲菴 金淨),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이다.
1663년(허현종 4)에 본읍 유생 한수신(韓秀臣)이 상소하여 예조좌랑 정동엽(鄭東燁)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성곡서원(星谷書院)’의 이름으로 사액(賜額)하였고, 복호미 4결을 내려주어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편액(현판)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썼고, 학규(學規)는 경주이씨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와 진보현감 이진병(眞寶縣監 李震炳)이 함께 지었고, 원규(院規)도 이유태가 지었다.
성곡서원에는 원장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훈도 1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지방교육에 힘썼고, 삼남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유림들이 전답을 헌납해 재정이 풍부, 지방교육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돼 성곡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밭으로 변해 성곡서원지(星谷書院址)라는 유허비(遺墟碑)에 위치, 면적, 연혁[金侁 尹澤 金淨 吉再 趙憲 高敬命의 六賢을 配享한 書院址다.
光海君 9年(1617) 地方儒林에 의거 創建되었으나 高宗 五年(1868) 大院君의 書院 撤廢令에 의하여 毁撤되었다]이 기록돼 있어서 이곳이 서원의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곡서원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됐던 낙천재 김신은 254년 역사의 성곡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246-1소재 야은 길재를 배향한 청풍사(淸風祠)에 추배(追配)했다가 1946년 후손들이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 산22번지에 황풍사(皇風祠)를 창건해 75년 만에 이배(移配)했다.
1969년 황풍사 입구에 만리황풍비(萬里皇風碑)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향사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