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유영규 ‘환경대통령’의 외곬 환경운동

지인과의 저녁식사에서 그를 만났다. 짧은 시간 자기소개를 들었지만 살아온 역정이 곡진해서 다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헤어졌다. 얼마 뒤 병원에 입원했다며 퇴원 후 만날 일정을 잡기로 하여 기다리던 차에 부음을 들었다.
동네 이웃 주민들로부터 외국 고위인사에 이르기까지 ‘환경대통령’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던 고 유영규 환경운동가 겸 중동 전문가는 64세의 길지 않은 생애를 마쳤다. 본인으로부터 살아온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던 약속은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으니 그가 남긴 SNS 자료들과 주변 사람들의 전언으로 드라마 같은 삶을 간략히 조명해 보기로 한다. 쓰레기 줍기 20년, 새벽 4시 쓰레기봉투와 집게를 들고 집 근처 산에 올라 시작하는 쓰레기 수거의 일상 그리고 그런 의지와 집념을 형성하게 된 삶의 이력에서 1970년대 이후 우리 사회 산업화와 환경오염이라는 빛과 그림자를 일정 부분 겹쳐 볼 수 있었다.
1960년 충남 천안시 풍세면에서 6남2녀중 여섯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근 고등공민학교에 진학했으나 가정형편상 두 동생의 학업을 위하여 한 학기 만에 중퇴하였다. 6.25전쟁에서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이등상사로 전역한 부친은 산지기로 일하면서 8남매를 양육하였는데 어려운 형편 속에서 일찍 철이 들어 여러 직종을 전전하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궁핍한 삶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청결’에 대한 인식과 실천이 남달랐고 이런 잠재의식이 환경운동에 매진하도록 이끈 저변의 기제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게 본인의 이야기다.
1983년 리비아로 출국하여 국내기업의 현지 신도시 건설공사 현장에서 시간당 1달러를 받고 일하기 시작, 만 10년여 단 한 번의 휴가도 없이 근무한 기록을 세웠다. 초기에는 별다른 기술이 없어서 리비아 정부관계자, 발주처 파견감독관 보좌임무였는데 이때부터 익힌 아랍어와 현지 문화, 현지인들과의 교분이 이후 중동 각국을 오가며 환경운동을 벌인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산유국이자 처음 발 디딘 외국이었던 리비아 곳곳에 쓰레기가 산적한 모습에 놀랐던 그가 본격적인 쓰레기 수거에 나선 것은 2004년, 집근처 개화산 치현산 등지에서였다. 처음에는 이상한 사람, 쓰레기 줍는 척 하며 군부대를 정찰, 정보를 수집하는 간첩 등으로 오해 받은 일이 비일비재 하였다. 현지 인맥의 초청과 비즈니스로 빈번한 중동지역 체류 기간 중 45℃가 넘는 폭염 속에서도 매일 쓰레기 수거에 나서는 동안 외국 스파이로 오인되거나 휴대전화 압수 등 곤혹을 치렀지만 그의 진심이 알려지면서 꽃다발을 놓고 가는 현지인을 비롯하여 중동 국가 지도자들과 왕실에도 알려져 숱한 감사장, 표창장, 명예직위 등을 받아왔다. 아무런 보상이나 경제적 목적 없이 매일 국내외 곳곳의 쓰레기를 줍고 플라스틱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홍보 이벤트를 벌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환경대통령’으로 불리게 되었다.
중동 국가 다양한 계층의 인사들과의 끈끈한 네트워크가 큰 자산이라고 자부하던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 오랜 세월 쓰레기 줍는 고된 육체노동에 골몰한 탓이었는지 수술부위 재발로 입원하였다가 다른 질환이 발견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국민 모두가 ‘환경대통령’이 되는 사회를 염원하던 고 유영규 환경운동가가 이제 주울 쓰레기가 없는 깨끗한 나라에서 편히 쉬시기 바란다. 누구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도 구체적이고도 지속적인 실천이 그리 쉽지 않은 쓰레기 줍기 수십 년 그리고 분리수거 등 환경보호의 중요성을 적극적이고 저돌적인 행동으로 실천한 유영규 ‘환경대통령’의 수범사례가 오래 기억되기 바란다.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