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벌의 꿈 ①

노루벌에는 숲과 강과 벌판 그리고 생명이 있다. 우뚝 솟은 구봉산 자락과 고고히 흐르는 갑천을 끼고 고리 모양으로 이어진 노루벌은 청정자연의 것을 품으며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다. 노루벌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연생태림에서 사람과 자연의 경계는 이미 허물어졌다. 보전과 변화 사이 구봉산 그리메 아래로 펼쳐진 노루벌의 꿈에 대해 기록해본다. 


    [김지현의 체험IN]    
노루벌길 트레킹 5.5K

입춘이 훨씬 지났지만 노루벌은 아직 겨울의 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초록버스를 타고 구불거리는 길에 들어서면서 마주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내게 어서 오라 손짓한다. 아득히 보이는 구봉산 자락은 하얀 모자를 쓰고 여즉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다. 지저귀는 새와 흐르는 물 소리는 도심을 벗어난 나에게 휴식을 선사했다. 그렇게 노루벌은 봄옷으로 갈아입기 전 겨울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 속으로

초록버스 25번 타고
‘수영장 정류장’ 내려
여백같은 풍경 속으로…
그곳엔 생명이 있었다

#. 날리는 눈비

지난 23일 오전 7시. 눈을 뜨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했다. ‘노루벌 트레킹’을 계획한 날이었다. 일주일 동안 봄이 오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연신 날이 차갑더니 트레킹을 당장 두어 시간 앞두고 먹구름이 짓궂게 인사를 해왔다. 딱 봐도 눈이나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외출과 동시에 흩날리는 눈비가 얼굴을 때렸다. 혹여 걷는 동안 춥지는 않을까 핫팩과 초코바, 물을 챙겨 시내버스에 올라탔다.

노루벌로 가기 위해서는 시내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이동한 후 외곽노선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생소한 길이었던 탓에 선배들과 만남을 약속한 정류장을 놓치지 않도록 연신 차창 밖을 살폈다. 먹구름이 계속해서 꾸물거리는 듯했지만 다행히 눈비는 멈췄다. 물론 눈비를 대신해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긴 했다.

#. 초록버스

가수원육교 정류장서 내려 몇 걸음 더 이동한 후 봉곡동 종점으로 향하는 25번 버스로 갈아탔다. 도심 외곽을 달리기 때문일까, 승객은 어르신 몇 분이 전부였다. 초록버스가 가수원동을 벗어나자 창밖으로 도심과는 다른 풍경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전에 이런 곳이 있었나?’ 괴곡동·고리골, 고릿골구름다리, 벌말….’ 시골마을로 들어서는 듯 정겨운 정류장 이름들. 우리의 종착지는 대전 서구 흑석동에 위치한 수영장 없는 ‘수영장’ 정류장이었다. 말장난 같지만 수영장 정류장 인근에는 정말 수영장이 없다. 다만 흑석유원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곳임을 나타내는 의미인가 싶었다.

몇차례 구비진 길을 타고 달리던 초록버스가 악수를 해오던 나뭇가지와 작별하고 멈춰섰다. 이윽고 일행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수영장 정류소에는 25번 초록버스만이 정차한다. 버스에서 내리니 다행스럽게도 비가 그쳤다. 누군가 깜빡 두고 간 듯한 검정 우산만이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영장 정류장 바로 앞 물안리다리로 향했다. 물안리다리를 건너면 본격적인 노루벌 트레킹이 시작되는 셈이다. 이날 우리는 갑천누리길 2코스 중 노루벌길(흑석유원지~상보안유원지) 완주를 목표로 했는데 갑천누리길 종합안내도를 보니 살짝 염려되는 거리였다. 걱정도 잠시, 흐르는 갑천의 소리에 홀린 듯 물안리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 풍경들

드넓은 노루벌의 품은 생각보다 고요하고 따뜻했다. 트레킹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코끝에 어린 추위는 어느새 사라졌고, 흐르는 갑천과 눈 덮인 먼 산만이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갑천의 유속은 빠르게, 때론 유유히 흘러가며 존재감을 드러냈고 거대한 풀숲은 흙내음을 풍기며 우리를 맞았다.

장평보-노루벌 돌아서
상보안까지 이르는 길
발길에 부딪히는 시간
모든 것이 생명이었다

유려한 오솔길을 지나 출발지로부터 1.7㎞, 장평보유원지에 이르렀다. 노루벌로 향하는 U자 형태의 물길을 따라 걷는 본격적인 시작 구간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억새가 안내하는 대로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노루벌적십자생태원(2.7㎞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반딧불이와 미선나무, 메타세쿼이아 등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내 키보다 수 배 큰 메타세쿼이아가 하늘 높이 뻗으며 자태를 뽐냈다. 부채모양의 잎을 가진 미선나무는 아쉽게 볼 수 없었다. 다가오는 봄, 미선나무가 피어나기 시작하면 다시 오겠노라 결심했다.

노루벌적십자생태원을 벗어나 4㎞ 지점에 닿았다. 노루벌 변곡점이다. 자박자박 갑천 물길이 넘실거리고 평평한 자갈밭이 있는 이곳은 반딧불이가 서식하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자갈밭에 앉았다. 노루벌의 품에서 노루벌을 감상했다. 멀리로는 겨울나무들이 군집한 구봉산이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구봉산 암벽이 서로에게 몸을 기대어 있었는데 흐르는 갑천까지 더해지니 한 폭의 수묵화 그 자체였다.

#. 생명들

대지는 생명의 터전이다. 노루벌 역시 마찬가지다. 산, 들판, 강. 생태림 그 자체를 보전하고 있는 노루벌에서 다양한 생명을 마주했다. 변곡점을 지나며 잠시 고개를 들고 올려다 본 하늘에서 수리류로 추정되는 검은 새가 장시간 비행하고 있는 게 포착됐다. 몇 차례의 날갯짓을 하던 새는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바람을 타며 하늘에 머물렀다. 자연 그대로의 것. 그 위에서 노니는 새의 움직임은 자유로웠다. 그게 부러웠다.

또 노루벌에서는 민물가마우지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상공에 머물던 민물가마우지가 빠르게 갑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민물가마우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유영하며 먹이를 사냥하는 듯했다. 생명의 움직임이 신비로워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여유도 잠시 트레킹 종착지인 상보안유원지가 멀지않은 듯해 다시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던 중 한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날이 평온했을 때 꽃망울을 터뜨리려 했었는지 미처 자라지 못하고 시들어 버린 자그마한 꽃잎이었다. 노루벌에서는 모든 게 생명이었다.

자그마한 꽃잎 뒤로 갑천누리길 종합안내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현위치 표시는 물안리다리와 딱 반대지점에 표시돼 있었다. 5.5㎞ 노루벌 트레킹은 신선놀음처럼 시간가는 줄 몰랐다.

글=김지현 기자 kjh0110@ggilbo.com 
사진=김동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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