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계서원에 중흥시조 김신의 위패 모셔

금산김씨의 시조는 김세적(金世迪)으로 서기 1000년경 학사(學士)를 지내고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오른 인물로 경순왕의 후예로 전한다. 시조의 배위는 작(爵)이 중군부인(中郡夫人)이다.
중흥시조며 사실상 1세조인 김신(金侁)은  고려조에 충간의 시호를 받고 원나라 관작은 금자광록대부로 요양성 참정을 지냈다.

김신(金侁)은 경순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손자로 우복야(右僕射:우복야는 고려 시대에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부총리)를 지내고,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판삼사사(判三司事:고려때 삼사(三司)의 종1품으로 재신(宰臣:재상)이 겸임)를 지낸 김정보(金正寶)의 13세손이다.

김신(金侁:?~1274년. 자는 윤식(倫直), 호는 낙천제(樂天齊), 시호 충간 忠簡)은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1076년(문종30)에 종2품 문산계 제3계로 정했다고 하며 1275년(충렬왕1) 원나라의 간섭으로 광정대부(匡靖大夫)로 고치고, 1356년(공민왕5)에 금자광록대부로 바뀌면서 종1품 상계가 됐으며 1362년에 폐지됨)로 요양성참정(遼陽省參政:참정은 참지정사. 문하평리를 이르는 말로 고려의 직제로 보면 중서문하성의 종2품 재신반열)으로 고려를 위해 공을 세우고 귀국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김신의 출생지인 부리현(충남 금산군 부리면)을 금주(錦州)로 승격시키고, 김신은 금주군(錦州君.금주는 금산의 옛 이름)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은 본관을 금주(錦州)의 현재 지명인 금산(錦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죽계서원>-전북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1777번지 평장마을

죽계서원은  1713년(숙종 39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금산김씨 중흥시조이자 고려 때의 이름난 무신이었던 김신(?~1274)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또한 조선의 무신 장필무(1510~1574)와 임진왜란 때 전사한 두 아들 장의현, 장지현(1536~1593)도 이곳에 배향됐다. 1869년(고종 6년)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거됐으며, 현재는 건물의 일부만 남았다.

서원이 자리 잡은 곳은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의 평장마을로 평장사(平章事,정2품 부총리)를 지낸 김신의 출생지라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죽천리는 옛부터 대나무가 많아 대밭(竹場)이라 했고 본래는 금산군에 속했다.1674년 무주도호부에 편입됐고 1914년 안성면에 속하게 됐다.
 
효자 김신은 경덕재(經德齋, 고려 국학(國學) 7재(齋)의 하나로 1109년(예종 4)에 7재를 설치하고 그 안에 시경(詩經)을 전공하는 재를 두어 경덕재라 불렀음)에 입학해 공부하고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했다. 좌정언, 추밀원 부사(정령을 출납하던 추밀원의 정3품) 등의 벼슬을 하다가, 원종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에 수행했다. 그는 고려 임금에게만 신임을 얻었던 것이 아니라, 원나라 황제에게도 신임을 얻었다.

김신은 몇 년 뒤에 원종을 따라 고려로 돌아왔는데, 원나라 장군의 부탁 때문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가게 됐다. 원나라가 고려와 힘을 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다가 실패했는데, 원나라 도원수 홀돈이 자기 죄를 덜기 위해 김신을 데리고 가서 황제에게 천거했던 것이다.

황제는 김신에게 자주 자문을 구했으며, 요양성의 참정이라는 높은 벼슬까지 내렸다. 당시 고려의 임금이나 세자는 절반쯤 원나라에 들어가 살아야 했으며, 국내 정치도 많은 간섭을 받았다. 김신은 이런 시절에 원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조국 고려를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김신이 고국에 돌아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싶어하자, 원나라 성종황제가 김신에게 ‘만리황풍(萬里皇風)’이라는 글을 써서 주며 귀국시켰다. “만리 밖까지 황제의 은혜가 끼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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