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균 중국산동사범대학 한국학연구소장

대전 유성구 도룡동에는 현대식 건물 사이로 고풍스러운 한옥이 자리하고 있다.

건물 가운데 효열비각 네 개 동이 함께 있는데 여흥민씨 집안의 재실과 효열정려이다. 정려는 공적으로 인정된 당대 최고의 충신 효자 열녀에게 내린 구조물이다. 대전에 세거한 민 씨 가문에 3대에 걸쳐 7명의 효열이 나왔고 이들을 기리는 정려비각들이 여기에 세워진 것이다.

표창된 이들은 주로 16~17세기에 살았으니 성리학이 한창 무르익어 번창하던 시절 이야기다.

보통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는 말을 하는데 전혀 근거 없지 않다. 평소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보고 배운 것이 효라면 자녀들은 당연히 그대로 따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조상 가운데 이름난 효자가 있다면 더더군다나 효는 일상이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맥을 잇는 것이 후손들의 책무가 된다. 민 씨 가문의 3대에 걸친 7명의 효자가 증명한다. 이들은 아마도 민씨의 먼 조상이자 공자의 수제자 중 한 사람인 민자건의 효행 이야기도 들었을 게 분명하다. 민자건은 한겨울 홑옷을 입히며 자신을 박대한 계모에게도 효성을 다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이야기는 ‘민손단의(閔損單衣)'란 사자성어로 한국과 중국의 각종 효행록에 수록돼 내려왔다. 그 민자건의 무덤이 산동성의 수도 제남시에 있다.

대략 30년 전 중국 제남에서 교환교수 생활 할 때의 일이다. 세미나 등 일이 있어 숙소가 있던 산동사범대학에서 자전거를 타고 산동대학에 갈 때면 매번 민자건로를 이용했다. 수많은 공자의 제자 가운데 유독 민자건의 이름을 딴 도로명이 특이하긴 했지만 서울의 퇴계로, 율곡로처럼 그냥 옛날 사상가의 이름을 딴 도로명 정도로 생각했다. 어느 날 궁금증이 발동해서 주변 중국 교수에게 도로명에 따른 사유가 있는가를 질문했지만 평소 관심이 없었다며 산동성 문물국에 직접 알아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문물국이고 그곳에 제남시 주변에 있던 각종 비석과 석물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고는 자주 찾아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자건로 한 지점에 민자건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이후 대전의 효지도사 분들을 비롯한 여러 한국분들과 산동성 유교문화를 답사할 때면 반드시 제남시 소재 민자건 묘를 찾았다.

처음 본 민자건 묘는 잡풀로 우거진 봉분과 각종 비석과 상석들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치됐고 같은 장소에 있던 라마불교 사원의 온갖 구조물이 즐비했다. 그리고 몇 년 뒤 다시 찾았을 때의 민자건 묘는 단단한 시멘트로 포장된 상태였다. 잔디 봉분에 익숙한 한국 사람들 눈에는 다소 어색했지만 예초작업이 필요 없는 단장된 시멘트 봉분은 실용적 중국인다운 발상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네 다양한 봉분과 무덤의 형태를 생각한다면 앞서갔던 모습일 수도 있다. 참고로 복건성에 있는 주자 무덤의 봉분은 작은 돌들을 벽돌처럼 활용했으니, 혹 우리처럼 잔디를 써야한다고 생각한다면 이 또한 심각한 편견일 것이다.

한번은 답사팀 가운데 여흥민씨 집안 출신 두 사람이 참여했다. 비록 덜 정비되고 어수선한 무덤과 주변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들의 조상에 예를 깍듯이 갖추는 모습을 보면서 감동받은 일이 있다.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여흥민씨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고려 중엽 중국 사신 민칭도가 귀화하면서부터이고 대전에는 15세기경 입향했다고 한다. 이후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던 은진송씨, 광산김씨 문중과 교류하며 대전의 중심 가문으로 성장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들 문중의 정치적 영향력과 사상적 노선보다는 이들 집안에서 배출한 효열자들이 대전을 효문화도시로 만드는 데 여러 모로 기여했다는 점이다. 이런 대전의 전통적 효문화가 오늘날 한국효문화진흥원과 뿌리공원, 족보박물관과 같은 효문화 시설이 들어서는데 알게 모르게 기여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한중 효문화 교류는 물론 한국 효문화의 세계화에도 이들 효문화 자산이 큰 밑거름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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