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서 내려온 민족무교

한지로 다양한 문양 제작

하나의 예술품으로 탄생

충남 무형문화재 '설위설경'의 명맥을 잇는 대전 도원정사 권경미 원장이 한지 위에 문양을 새기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가족의 안녕과 무사안일(無事安逸)을 기원하는 다양한 종류의 행동양식이 존재하고 있다.
그 옛날 먼 길을 떠난 가족의 안전을 기원하며 첫 새벽에 길은 맑은 ‘정화수’ 떠놓고 기도를 올리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쳐 액운을 막는 행위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모든 행위의 근간에는 부정을 걷어내고 집안의 안과태평(安過太平)을 기원하는 마음이 내재돼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끝난 수능시험에서 자식들이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각 지역마다 고유한 형태의 기원양식이 전래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충청지역에는 독특한 형식의 ‘설위설경’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옛 선조들은 10월 상달이 되면 한해의 농사를 마무리하고 첫 수확한 곡식과 과일을 엄선해 감사한 마음을 담아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께 작은 정성을 올림으로써 가정의 안과태평을 기원했다.

정성을 올리는 과정에서 한지 위에 독특한 문양을 새겨 만들어 집안 곳곳에 걸었다. 모든 부정과 탁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성현의 말이나 행실을 적은 경전을 읽는 ‘경문’을 오래시간 수행해 온 충청지역에선 경전을 풀어서 말로하지 않고 한지 위에 문양을 새기는 ‘설위설경’이 발달했다. 경문을 줄이는 대신 다양한 형태의 설경을 제작해 마음을 담았다.

설위설경은 한지에 문양을 새기는 자체로도 이미 예술적 가치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독특하고 오묘한 문양을 새기는 손길에선 장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대전에선 10여 명만이 설위설경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도원정사(중구 태평동) 권경미 원장은 설위설경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위로받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자리를 꿈꾸고 있다.

날카로운 칼날이 한지 위를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면 다채로운 설경의 문양이 꽃을 피운다. 권 원장은 정형화된 설경 제작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만물의 형상을 제작하는 ‘창작 설경’에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권 원장의 손길이 한지에 닿으면 어떠한 대상도 작품으로 살아난다. 섬세함은 물론 오랜 시간의 인내가 빚어낸 작품에선 설경의 매력이 물씬 풍겨 나온다. 온몸의 감각을 칼 끝에 집중하고 새겨 내려가는 눈빛에선 기품이 느껴진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음과 정성이 온전히 투여되기에 그 가치가 더욱 빛나는 이유일 것이다.

설경을 제작할 때에는 식사도 거를 정도로 온 정신을 쏟는다는 권 원장은 설경 제작에 앞서 일주일 동안 마음을 정갈하게 하는 참선 시간을 갖는다.

집안의 우환이나 가족의 안녕을 바라며 의뢰해 온 신도들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다. 각양각색의 사람이 존재하듯 각자의 고민의 무게와 깊이, 형태가 다를 것이다. 이를 마음 속 깊이 되뇌이면 그 사람에 맞는 설경이 떠오른다. 권 원장이 창작 설경에 매진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청지역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설위설경은 예술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98년 충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유주경 기자 willowind@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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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을 연구·발전시켜 사람들과 소통하고 파"

<도원정사 권경미 원장>

“종교와 문화, 자연이 어우러지는 공간, 많은 사람들이 소통하는 나눔의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도원정사(대전 중구 태평동) 권경미(45) 원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행복을 줄 수 있는 설위설경을 통해 소통하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경전의 의미를 말로 표현하는 경문과 달리 깊은 의미를 풀어서 한지 위에 문양으로 표현하는 설위설경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권 원장은 3년 간의 수행을 거친 후 지난 2004년 불가에 입문했다.

설위설경을 접한 후 자신도 타인을 위해 정성을 베풀고 싶어 설위설경을 배우기 시작했다는 권 원장은 2004년 은사스님으로부터 설경을 사사했다.

그는 이후 설경에 대한 자료를 꾸준히 수집하며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에 매료돼 지금까지도 연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 원장은 “설위설경이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다 보니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경향이 있고 어렵게만 생각하니 멀게 느껴지는 것 같다”면서 “그러나 설경을 비롯해 가족의 무사안위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형태가 우리나라에는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만큼 생활 속에 내재돼 있는 행동양식들이 많다.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어 “설경이 문서로 정리되거나 학문화되지 못하고 구전으로만 듣고 익혀 전승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수십 수백가지에 이르는 기법과 종류, 특히 인내가 필요한 설경은 요즘 같은 시대에 맞지 않아 배우려는 젊은 세대들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종교적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그 예술적 가치와 제작하는 사람의 마음 등은 어느 것에도 뒤처지지 않는 것이 설경이라고 권 원장은 강조했다.

권 원장은 “너무나도 힘들어 나를 찾아온 사람이 설경을 통해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얻어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꿋꿋이 버텨나갈 보람을 느낀다”며 “좀 더 쉽게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설경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많은 사람들이 설경을 이해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소망을 내비쳤다.

유주경 기자 willowind@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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