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국립고궁박물관, 국립국부기념관(쑨원), 용산사와 함께 ‘타이베이 4대 관광 코스’로 꼽히는 국립중정기념당은 국민당 주석이자 대만 초대 총통이었던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의 기념관이다. 중정(中正)은 장제스의 본명이다. 2.28 평화기념공원과 대만 총통부가 있는 MRT 2호선(붉은색) 다이타이위엔역(台大醫院站) 네거리에서 대만 총통부 남쪽 네거리인 MRT 2호선과 3호선 송산신점선(파란색)이 교차하는 중정기념당 역 출구를 나오면 중정 기념당이 있다.

흰색 바탕에 청색 기와를 얹은 30m 높이의 우뚝 솟은 정문에 ‘자유광장(自由廣場)’이라는 현판은 중국인들이 서성(書聖)으로 존경하는 동진의 왕희지(王羲之)의 글자를 집자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서원이나 향교 등의 입구에 액을 막기 위하여 세운 홍살문처럼 마을 입구나 큰길 입구에 세우는 것을 패루(牌樓)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한족은 흰색 바탕이고 만주족은 붉은색으로 세웠다. 한족의 대표적인 패루는 국립고궁박물관, 국부 기념관, 북경의 명 13릉 등에서 볼 수 있고, 만주족인 청의 패루는 북경의 이화원, 베트남 호이안의 광조회관 등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패루 하나만으로도 한족과 만주족의 민족적 갈등이 얼마나 치열한지 잘 알게 해준다.

장제스 사후인 1980년 4월 25만㎡(약7만 5000평)의 대지에 조성한 중정기념관은 정문 이외에 국립극장과 음악당 출입문은 물론 중정기념당 본관 1층에서도 드나들 수 있다. 타이베이뿐만 아니라 대만 전체의 패루 중 가장 크다는 중정기념관의 정문에 들어서면 좌우에 자금성의 황궁을 모방한 황금색 지붕을 한 건물이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 건물이 국립극장(國立戲劇院)이고, 왼편이 국립콘서트 홀(音樂堂)이다. 중정기념관의 입장료는 무료다.

광장은 유럽의 여느 광장처럼 판석을 깔았고, 중정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편에 아름답게 가꾼 화단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the Sound of Music)’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쉔브론 궁전의 정원을 연상하게 한다. 광장은 정부의 행사나 시민단체의 행사장으로 이용되고. 매일 아침 시민들이 전통 태극무 등을 하는 운동장이 되고 있다,

광장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70m 높이의 흰색 화강암으로 세운 중정기념관은 광장 양편의 황금색 건물인 국립극장이나 음악당과 달리 흰색 외벽에 청색 기와로 건축한 8각형 건물인데, 이것은 자유와 평등을 상징한다고 한다. 중정기념관으로 올라가는 89개의 계단은 장개석의 서거 당시의 나이를 상징하며, 기념당의 넓은 홀 한가운데에 장제스 총통이 통일하지 못한 대륙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6.3m의 동상은 25톤의 청동으로 주조했다고 한다.

동상 앞의 넓은 홀에서는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매시 정각에 제복을 입은 근위병 5~6명이 15분가량 교대식을 벌인다. 근위병 교대식은 병사들의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취지이겠지만, 근위병들의 경직된 모습은 관객에게 즐거움이나 호기심보다 대만 사회가 아직까지 ‘통제된 사회’라는 인식을 더욱 강하게 해줄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지 알 수 없는 근위병 교대식은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을 세운 초대 통령 쑨원(孫文)을 모신 국부 기념관에서도 매시 정각에 진행하고 있다. 관광객들은 중정기념관에서 장제스의 업적 자료를 관람하기보다 15분 남짓한 근위병 교대식을 ‘쇼’처럼 즐긴 뒤 썰물 빠지듯이 사라진다.

기념관의 2층은 관리사무실이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면 장제스 관련 전시실이다. 전시실 한가운데에는 그가 생전에 타고 다니던 롤스로이스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고, 주변에는 그의 업적을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장제스가 집무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밀랍으로 재현한 것인데,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서랍이 앞쪽에 만들어지고 의자 하나가 놓여있다. 그 의자가 세 번째 부인 송미령의 자리였다고 하니, 장제스의 위상이 조금은 어색하게 생각되기도 했다. 특별전시실은 일반 문화예술 전시회를 갖는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그밖에 기념품 판매점과 카페, 레스토랑 등이 있다.

1887년 중국 남부인 저장성(浙江省)에서 비교적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장제스는 19세 되던 1906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국비유학생이 되어 이듬해인 190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했다. 1909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한 장제스는 1911년 5월 신해혁명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쑨원의 광둥 신정부를 찾아갔다. 중화민국 임시 총통 쑨원은 그를 광저우에 세운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했는데, 1925년 쑨원이 죽은 뒤 장제스는 그의 후계자가 되었다.

1926년 6월 장제스는 군벌들을 제압하는 혁명군 총사령관으로서 북벌을 개시하여 1928년 북벌을 끝내고 베이징에 입성하고, 그해 난징(南京)에 국민당 정부를 세웠다. 그렇지만, 총통으로서 그의 정책은 대부분 탁상공론에 그쳤고, 또 군벌들은 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서 사회는 크게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농촌으로 퇴각한 공산당은 그들의 정부와 군대를 조직하여 국민당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외적인 일본군 격퇴와 국내의 공산당 척결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놓고 고민하게 됐다. 1936년 12월 만주 봉천 군벌 장쭤린(張作霖)의 아들로서 그의 지배권을 넘겨받은 장세린(張學良: 1898~2001)이 국공합작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가둔 시안(西安)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국공합작 하여 일본을 물리치기로 하고 풀려난 장제스는 자신을 연금했던 장세린을 항명죄로 체포하더니, 2차 국공내전이 재개되어 공산당에게 대륙을 빼앗기고 1949년 대만으로 패주할 때도 그들 호송하여 죽을 때까지 연금시켰다. 대륙을 차지한 중공군은 1949년 1972년 미국과 관계 개선을 이루고, 1979년 마침내 미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국민당 정부가 가졌던 지위를 모두 쟁취하면서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다. 1949년 대만으로 쫓겨간 장개석은 일제가 대만을 통치할 때 원예시험장으로 사용하던 곳을 총통 관저로 삼았는데, 이곳을 사림관저(士林官邸)라고 했다. 사림 관저는 1996년 미망인 송미령 여사가 미국으로 건너갈 때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비밀의 공간이었다가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