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함 침몰 사고 여파로 수면 아래 가라앉았던 행정도시(세종시) 이슈가 또다시 빅뱅을 예고하면서 정국이 들썩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지방선거를 5개월 앞둔 시점에서 내놓은 행정도시 수정안이 또다시 전국을 찬반 대립구도로 양분한 상황이다.
정부는 지난 1월 행정도시 수정안을 제시한 뒤 3월 23일 이를 뒷받침할 행정도시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중앙행정기관의 이전만으로는 행정도시의 자족기능을 확보하는 데 한계가 있고 중앙행정기관이 이전하면 국정 비효율에 따라 정책의 품질이 저하되고 위기관리능력이 저하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해 국가경쟁력 약화가 우려된다’는 게 이유다.
정부의 행정도시 수정 방침이 확고해 지면서 행정도시 논의는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이 대통령이 칼을 빼든 만큼 여당 내에선 친이계를 중심으로 당론 변경을 관철시키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다. 천안함 침몰로 잠시 관심을 돌렸던 정부도 정운찬 총리를 중심으로 행정도시 수정안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정안 홍보가 치열해질수록 원안 사수 열기도 달아오르고 있다. 특히 충청권에선 여전히 행정도시 수정안이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원칙론에서부터 수정안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국가균형발전…행정도시로 여물다
행정도시 사업은 참여정부 국가균형발전정책의 핵심 결정체다. 참여정부는 당초 신행정수도를 건설하고 광역단위 거점별 혁신도시와 기업도시 건설을 통해 국가균형발전의 틀을 완성했지만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신행정수도 계획은 무산됐다. 참여정부는 곧바로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했고 국회와의 논의를 통해 결과물을 도출했는데 그것이 바로 행정중심복합도시다.
당시 행정도시 건설 계획은 여야 합의로 마련된 행정도시건설특별법으로 담보됐다. ‘수도’냐 ‘도시’냐의 차이일 뿐 지역 간 불균형 해소라는 취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교통혼잡, 대기오염, 환경오염 등 수도권 과밀화에 따라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2008년 기준 약 30조 원)을 치러야 하는 상황인데도 반대로 지방은 공동화를 극복해야 하는 모순된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시대정신에 국민적 합의가 뒷받침 됐다는 얘기다. 민주당 등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까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강조하면서 행정도시 원안 추진 입장을 고수하며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권교체…행정도시 우롱
이완구 전 충남지사는 행정도시 수정 방침으로 시끄러웠던 지난해 11월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시라’며 정부를 비판했다. 국민적·사회적 믿음에 기초한 결속력이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면 충청권에서 만큼은 신뢰를 잃은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직격탄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 후 지난 17대 국회에서 행정도시특별법 폐지법안을 대표발의했던 박재완 의원을 청와대 정무수석에, 2004년 신행정수도특별법·2005년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소원을 주도했던 최상철 교수를 국가균형발전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대통령 후보 시절 ‘행정도시는 원안만 가지곤 안 된다. 자족기능을 추가하겠다. 반드시 약속한 건 지킨다’고 했던 이 대통령의 공언에 의구심이 촉발되기에 충분했다.
행정도시 계획 변경에 대한 의구심은 행정도시 이전기관 변경·고시 지연 상황이 이어지면서도 제기됐다. 정부조직을 개편했으면 그에 따라 행정도시 이전기관도 변화된 정부조직에 맞춰 변경·고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사실무근’으로 일관했다. 변경·고시가 미뤄지자 행정도시 계획 수정 의혹이 빗발쳤지만 정부는 정운찬 총리를 기용할 때까지 1년 가까이 ‘행정도시 수정 혹은 대안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의혹을 뿌리쳐왔다.
그러나 결국 의혹은 사실로 드러났다. 정 총리가 행정도시 총대를 맨지 4개월 만에 세종시 수정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수도권 규제를 풀고 5+2광역경제권으로 국토를 운용 방안을 재편하는 수순을 밟은 뒤 ‘행정도시 계획 수정’이라는 칼을 뽑아 든 것이다. 야권은 일제히 “대국민 사기극이다. 충청권을 철저히 우롱했다”고 성토했다. 지역 시민단체는 “약속하면 반드시 지킨다는 약속을 못 지킨 대통령을 누가 믿을 수 있겠나. 세종시 수정안은 지킬 수 있긴 한 것이냐”며 비꼬기도 했다.
▲충청권 혼란 가중
정부의 행정도시 계획 수정에 따라 행정도시와 톱니바퀴가 닿아 있는 지역사회 모든 분야에서 마비 증세가 나타났다. 특히 행정도시에 대한 불확실성은 충남도청이전신도시에 대한 기대심리를 약화시켰고 충남의 외자 유치 드라이브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한민국 국회가 보증했고 5년 이상 진행한 사업도 한 순간에 뒤집힐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충청인의 자존심도 큰 상처를 입었다. 대구·경북지역 모 대학 교수는 “거듭되는 논란에 세종시 문제가 귀찮은 존재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이런 모습은 아닌 것 같다”며 “이 같은 일이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일어났다고 한다면 지금 연기군의 평온한 모습과는 사뭇 다를 것”이라고 지역민의 자존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정부는 최근 대구·경북 등 타 지방에서 ‘세종시 계획이 수정되면 혁신도시 계획도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며 반발할 기미를 보이자 서둘러 혁신도시 원안 추진 방침을 밝혔다.
▲행정도시의 운명은
최근 한나라당 세종시 중진협의체가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고 해체되면서 세종시 수정안 논의는 6월 지방선거 이후로 미뤄질 공산이 커졌다. 여당 내 친이계 의원들은 빠른 처리를 촉구하고 있지만 친박계의 반대가 완강하다. 이렇게 되면 세종시 수정안 논의 시점(6월 임시국회)에서의 변수는 지방선거 결과에 집약될 수밖에 없다. 야당이 약진 한다면 세종시 수정안은 급속도로 추진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고 여당이 수성에 성공하더라도 세종시 수정안 논의로 여야는 정면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명박 정부 입장에선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충청권비대위 이상선 대표는 “행정도시 이슈를 중심으로 한 지방분권·균형발전 유권자연대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행정도시 논란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은 고집을 버리고 국민적 합의를 인정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행정도시 연혁
2003년 4월 14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지원단 발족
2003년 10월 21일 신행정수도특별법 국회 제출
2003년 12월 29일 신행정수도특별조치법 국회 본회의 가결
2004년 3월 12일 국회,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의결
2004년 4월 15일 제17대 총선-열린우리당 과반의석 확보
2004년 5월 14일 헌재, 탄핵심판 기각-노 대통령 업무 복귀
2004년 5월 21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 출범
2004년 7월 12일 최상철 교수 등 신행정수도특별법 헌법소원 제기
2004년 10월 21일 헌재,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판결
2005년 2월 23일 여야합의 행정도시특별법 도출
2005년 3월 2일 행정도시특별법 국회 의결
2005년 6월 15일 최상철 교수 등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소원 제기
2005년 11월 24일 헌재, 행정도시특별법 헌법소원 각하
2006년 1월 1일 행정도시건설청 개청
2006년 12월 21일 행정도시 명칭 ‘세종’으로 확정
2007년 7월 20일 행정도시 기공식
2007년 12월 19일 제17대 대선-이명박 대통령 당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