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코로나19 사태 속 차분히 유지된 방역 능력
자치단체 시민 일상생활 유지 위해 노력한 결과
탄핵 정국 속에서도 큰 혼란 없이 일상생활 이어져
다양한 사태 속에서 자치단체 큰 역할 맡아

연혁으로만 따지면 국내 지방자치는 햇수로 70년을 넘었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이미 지방자치 규정을 뒀기 때문이다. 이듬해 6·25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엔 지방의회 선거가 치러졌고 이후 군사정권을 통해 지방자치에 대한 열망은 더욱 타올랐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지방자치는 잠시 역사 속에서 모습을 감췄다. 그러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장기간 단식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1995년 첫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시행되고 정확히 30년이 흐른 2025년 지방자치는 이립(而立)을 맞았다. 분명 처음의 취지대로 지방자치가 성장했다고 할 순 없다. 중앙정부의 지극히 일부 권한을 자치단체가 수행하는 것에 불과해서다. 중앙정부의 지방으로 이양한 사무는 30%, 재정은 20%에 머물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의 30년이란 지방자치사(史)가 허투루 흘러간 건 아니다. 세계적인 팬데믹 속에서 K-방역의 저력 뒤엔 지방자치가 있었다. 또 지방자치를 근간으로 싹튼 풀뿌리 민주주의 정신 덕분에 최근의 대통령 공백이라는 정국 속에서도 시민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지진 않았다.
◆국가를 넘어선 대위기
지난 2019년 12월 중국의 우한에서 원인불명의 폐렴이 최초로 보고됐다. 대도시도 아닌 중국의 작은 시골에서 발생한 폐렴은 세계는커녕 중국 내부에서도 큰 관심이 없었다. 으레 좋지 않은 위생에 따른 여느 다른 바이러스와 비슷할 것이란 예상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불과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폐렴은 우한을 넘어 중국 전역을 삼켰고 인근 대한민국에도 마수를 뻗쳤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 몇 국가와 대륙 건너 서방에 해당 바이러스가 유입된 뒤 세계보건기구(WHO)는 긴급위원회를 구성했고 2020년 1월 국제공중보건비상사태를 발령했다. 코로나19가 처음으로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19가 수년에 걸쳐 모든 사람의 일상을 그토록 위축시키고 사회를 압박할 것이라는 걸. 우리나라 역시 비슷하게 생각했다. 과거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와 비슷하게 코로나19는 여름철이 되면 전염성이 현저하게 낮아질 것이라 예상했다. 이 때문에 초기방역은 안이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루에 수십만 명이 감염되는 사태가 발생했고 방역당국은 행정력을 총동원했지만 어느 국가도 코로나19를 제어할 수 없었다. 2022년 3월엔 코로나19가 말 그대로 기승을 부렸다. 확진자 수가 가장 많이 등장한 게 이때였다. 3월 16일 하루에만 62만여 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고 1주일도 채 되지 않은 22일 49만 명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 또 1주일 뒤인 29일 42만여 명이 격리에 들어갔다. 하루에만 10만 명 이상 확진자가 발생한 일수만 무려 80일 이상. 그야말로 팬데믹이었다. 국가의 방역망이 감당할 수준을 넘어가기 시작했고 제2의 흑사병이란 이야기까지 나왔다. 위드 코로나. 더 이상 보통의 일상으로 돌아가기 힘들고 코로나19와 함께하는 세상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사각지대 메운 지방자치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대전의 한 행정복지센터에서 근무했던 A(40) 씨의 당시 일과는 오전 6시까지 사무실에 출근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전날 코로나19 검사 결과가 이른 시각에 확정되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한 정보가 나오면 바로 이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발송했다. 그리고 바로 기초조사에 동원됐다. 확진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방역당국의 역학조사를 보조했다. 간단한 동선이 파악되면 이를 정리해 자치단체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후 별도 방역요원과 함께 방역활동에도 투입됐다. 일과 중간엔 코로나19 확진에 따른 격리 문의를 접수하고 확진자가 제대로 격리하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1주일에 한 번은 이들이 격리에 들어가는 동안 필요한 생필품을 준비했고 간혹 검사 현장에 나가 시민에게 검사 절차를 소개하며 잡무를 처리했다. 거리두기 시행으로 특정 시각 이후 영업하는 곳이 없는지도 파악한 뒤에야 겨우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취약계층을 위해 마스크 등을 직접 준비하고 이들에게 전달하는 일정이 추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격무로 인해 위장약과 편두통약을 달고 살았지만 불평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저 햇병아리 시절 멋모르고 선서했던 ‘국민을 위해 봉사한다’라는 것에만 몰두했다. 시민이 불안해하는 마음을 알기에 최대한 신속히 정보를 제공하고 그들을 안심시키는 것에만 집중했다.
코로나19 방역정책의 굵직한 줄기는 중앙정부가 설정했지만 이처럼 정책을 시행하는건 건 자치단체, 즉 지방자치의 역할이었다. 코로나19는 분명 엄청난 위기를 야기했고 생채기는 여전하지만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강점을 알릴 수 있는 계기였단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세계적인 비상사태에서 지방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답도 제공했다. 국가보다 더 기민하고 깊숙하게 지방자치가 자리 잡았기에 우리나라가 전세계적인 대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충청권으로 한정하면 코로나19 확진자 증가로 병상이 부족해지자 충청권 4개 시·도는 공동 병상 운영을 추진하는 등 지역 실정에 맞게 조치했다. 이장우 대전시장은 야외에서 노 마스크를 중앙정부에 건의하는 등 자치단체는 코로나19 변곡점마다 팬데믹에서 선제적 조치에 나설 수 있었다.
◆대통령 공백 속 평온했던 일상
지난해 12월 3일 밤 10시 28분 대한민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긴급담화 생중계를 통해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라고 선언했다. 비상계엄 선포 1시간 만에 계엄사령부가 설치됐고 11시 25분경 계엄사령관으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 임명됐다. 계엄사령관은 11시 27분경 6개 조항의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를 3일 밤 11시부로 발령했다. 국회와 지방의회, 정당의 활동과 정치적 결사·집회·시위 등 일체 정치활동을 금지했고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도록 했다. 전국 자치단체는 곧바로 비상회의를 열고 어떤 상황에서든 시민의 안전과 재산을 지키겠단 점을 분명히 했다. 다행히 4일 새벽 1시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만장일치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의결하며 비상계엄은 막을 내렸다. 이후 전국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비난했고 윤 전 대통령의 탄핵 여부에 대한 찬반 집회가 곳곳에서 펼쳐졌다. 땅거미가 지면 유동 인구가 제법 많은 곳엔 어김없이 인파가 모여 각자만의 논리를 폈다.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갈등의 시작이었고 일부에선 물리적 충돌까지 발생했다. 그러나 효월(曉月)이 뜨기 시작하면 광장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구속되고 헌법재판소가 윤 전 대통령을 파면하는 등 행정부 수장의 공백이 이어지고 있지만 지방자치는 굳건히 버티고 시민 삶을 유지하는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지방자치법에 따라 설립된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는 대통령 권한대행과 직접 만나 국정은 물론 지역 현안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짧지만은 않은 30년의 지방자치는 이렇게 시민의 곁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되레 중앙에서 틀어쥔 권한을 지방으로 더욱 이양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이란 제왕적인 권위를 가진 이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두가 알았기 때문이다. 지방자치는 이제 개헌이란 시대정신을 가져왔다.
김현호 기자 khh0303@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