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소피아 성당 정면

아시아와 유럽에 걸쳐 있는 도시 이스탄불에서 고대 유적은 대부분 유럽지역의 구시가지에 있다. 구시가지인 술탄 아흐메드 거리에는 소피아성당(Hagia Sophia)이 있고, 커다란 원형 분수대 건너편에는 튀르키예 최대의 이슬람 사원인 ‘술탄 아흐메드 1세 모스크(Sultan Ahmet Mosque: 블루 모스크)’가 일직선으로 있다.

395년 동·서 로마로 양분된 이후 동로마 제국은 BC 667년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 비잔티움(Byzantium)을 세운 이스탄불이 수도여서 비잔틴제국이라고도 했는데, 동로마의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이스탄불에 세운 기독교 성당이 소실되자 532년 소피아성당을 착공하여 5년 만인 537년 12월 준공했다. 소피아성당은 아파트 20층 높이에 해당하는 거대한 건물로서 1626년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이 건축되기 전까지 1,100여 년 동안 세계 최대의 성당이었다.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너무 감격하여 “오! 솔로몬이여! 나, 그대를 이겼노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황제의 기도실(둥근 모자이크 바닥)
황제의 기도실(둥근 모자이크 바닥)

가로 69m, 세로 75m, 돔의 높이는 56m, 돔의 지름 32.6m인 소피아성당은 기둥과 벽면은 당시 최고 기술인 프레스코화(Presco)와 모자이크(Mosaic)로 장식했다. 모자이크란 BC 3000년경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색깔 있는 돌조각을 접착제나 회반죽을 칠한 벽이나 바닥에 무늬를 맞춰서 붙이는 기법이었고, 프레스코는 BC 3000년경 미노스 문명의 중심인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궁 벽화에서 석회 반죽을 벽면에 칠해서 평평하게 만든 뒤, 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물감으로 처음 그림을 그린 기법이었다.

2층에서 내려다본 1층
2층에서 내려다본 1층

물감을 사용하는 만큼 투명한 느낌을 주고, 수채화처럼 깨끗하고 맑은 느낌을 주어서 오늘날 영어로 신선하다는 의미 fresh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로마양식과 이슬람의 돔 양식을 절충한 독특한 양식의 소피아성당은 ‘비잔틴 양식’이라 하여 이슬람 건축양식의 기초가 되었다(자세히는 2023. 2. 15. 바티칸박물관 참조).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우측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성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
중앙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우측에는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성 소피아 대성당을 봉헌하는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

726년 로마 교황이 미개한 게르만족의 포교 수단으로 성상(聖像)을 이용하자, 비잔틴제국의 교황 레오 3세는 성상 파괴령을 내렸다. 이에 로마 교황은 비잔티움의 동방정교회(正敎會)를 파문했고, 정교일치의 동로마 제국 황제도 로마 교황을 파문하여 두 교회는 완전히 단절됐다.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등 4개의 교회 연합도 로마 교회와 갈라져 동방정교회가 됐다. 그 후 1095년부터 1291년까지 약 2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전쟁터가 됐다. 애초 이슬람에 빼앗긴 예루살렘을 탈환하자는 요청으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목적이 변질되어 1202년 제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유혹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침입해서 3일 동안 비잔틴제국의 수많은 문화재와 보물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이것은 가톨릭교회에 의한 동방정교회의 파괴와 약탈이었으며, 이후 동로마는 멸망의 길을 재촉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황금 모자이크 벽화
성 소피아 성당에서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황금 모자이크 벽화

1453년 5월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개칭하여 제국의 수도로 삼고, 이슬람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소피아성당보다 우수한 모스크를 지으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러자 소피아성당의 네 귀퉁이에 모스크의 첨탑 미나렛을 세웠고, 성당 내부는 기독교 예배를 주도하던 사제단을 철거하고 메카 방향을 향한 기도실 미흐라브(mihrab)를 만들었다. 성당 벽면의 기독교 성화들도 모두 백회칠로 지운 뒤, 그 위에 이슬람교 코란의 금문자와 문양들을 채워서 모스크로 바꿨다. 그리고 1차 대전 후 오스만제국이 해체된 1935년에는 소피아박물관으로, 2022년 1월부터는 또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바뀐 사원이다. 소피아성당은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기독교 문양에 덧칠한 이슬람 문양
기독교 문양에 덧칠한 이슬람 문양

동서양을 불문하고 지배 세력이 바뀌면, 신전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소피아성당만이 아니었다. 로마 시내의 한가운데에 있는 판테온 신전은 로마인들이 믿는 전통적인 다신교 신전이었으나 기독교 교회로 바뀌었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도 힌두 신에게 바쳐졌다가 불교사원으로 변신했다. 또, 중세에 가장 아름다운 사원으로 꼽혔던 스페인 코르도바의 모스크 한가운데에도 고딕 양식의 대성당이 있다.

중앙엔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고, 황제는 돈주머니, 왕비는 두루마리를 기부하는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
중앙엔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고, 황제는 돈주머니, 왕비는 두루마리를 기부하는 모습을 묘사한 모자이크 벽화

2020년 7월 튀르키예 정부는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이슬람 사원(모스크)으로 바꾼 뒤 내외국인에게 무료 개방하더니, 2024년 1월부터 외국인에게만 25유로(약 4만 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슬람 모스크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며, 여성은 히잡이나 스카프를 착용해야 한다.

중앙돔 문양
중앙돔 문양

소피아성당의 본관에는 모두 7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그중 가장 크고 높은 가운데 출입문이 황제와 대주교만 출입할 수 있는 황제의 문(Imperial Gate)이다. 황제의 문은 노아의 방주처럼 참나무로 만들고, 문틀은 청동으로 만들었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1, 2층이 통층이어서 훨씬 더 높고 넓어 보이는데, 가장 높은 돔 천장에는 아랍어로 된 코란 구절이 있다.

2층 천장에 그려진 문양들
2층 천장에 그려진 문양들

황제의 문 맨 위에는 예수를 중심으로 성모 마리아와 천사 가브리엘, 그리고 비잔틴 황제인 레오 6세(928~929)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1층 홀은 동서 77m, 남북 71.7m로서 약간 직사각형이고, 1층 오른편의 작은 방 같은 공간이 황제가 앉는 좌석이다. 기도할 때 황제는 그 앞의 둥근 모자이크가 있는 바닥에 나와서 경배했다고 했지만, 황제가 1층 본당으로 입장하는 것은 자신의 대관식 날 하루뿐이고, 예배 때는 다른 길로 마차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1층의 신하나 신자들과 달리 예배를 보았다. 황제가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황제의 길’이라고 하는데, 이곳은 계단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편편한 돌을 깔아 놓았다. 황제가 탄 가마가 흔들리지 않고 2층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했다.

성당 천장의 천사상
성당 천장의 천사상

2층은 길이 81m, 넓이 70m에 이르는 광대한 3개의 회랑으로 통하는데, 2층의 오른편에는 ‘천국의 문’이라고 하는 대리석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가운데에 예수, 오른쪽에는 세례자 요한,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가 있는 모자이크가 정면으로 보인다.

예전처럼 박물관과 갤러리로 이용하고 있는 갤러리 끝에는 오른쪽에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고, 양옆에는 콤네노스 2세(1118~1143)와 헝가리 출신 왕비 이레인, 아들 알렉시오스의 모자이크화가 있다. 그리고 왼편에는 앉아 있는 예수를 중심으로 1042년 4월부터 6월까지 겨우 2개월간 여황제였던 종이와 그녀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1042~1055)의 모습이 있다. 이 그림들은 1847년 스위스의 건축가 풋사티(Fossaati)가 아야소피아의 보수를 맡아 일하면서 벽면의 두꺼운 회칠을 벗겼을 때 비잔틴 시대의 화려한 모습들이 드러났다고 한다. 이렇게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소피아성당은 중세 동서양의 종교와 예술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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