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수필가, 여행작가

▲ 지하궁전 모습

소피아 성당을 관람하고 나온 우리 가족은 넓은 도로를 건너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지하 궁전(Yerebatan Saray)을 찾아갔다. 왕복 2차선 도로변에 단층건물인 지하 궁전은 건물 외벽에 지하 궁전임을 알리는 간판과 안내문이 없다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한데, 튀르키예어로 예레바탄은 ‘지하’를 의미하고, 사라이는 ‘궁전‘이라고 한다. 지하 궁전은 1925년 이스탄불의 지하철 공사 중에 우연히 발견된 거대한 지하 저수시설이다.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동로마 황제가 되어 수도로 삼은 이스탄불을 '신 로마'(New Rome)라고 했는데, 325년 ‘신 로마’에 소피아 성당을 건축하고 자기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고 했다. 콘스탄티노플이란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많은 로마인이 콘스탄티노플로 밀려오는 등 도시가 크게 확대되면서 시민들의 식수가 부족해지자,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20㎞ 떨어진 벨그라드(Belgrad) 초원에서부터 수로를 만들어서 물을 끌어와서 도시의 여러 곳의 커다란 저수조를 만들어 물을 저장하고, 또 공급했다. 오늘날 도시의 상수도 배관시설처럼 먼 옛날 시 외곽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도교(Aqueduct: 水道橋 혹은 導水橋)는 BC 19년 아그리파 황제가 최초로 로마에서 22㎞나 떨어진 수원지 살로네샘에서 트레비 분수까지 물을 끌어오는 공사를 했는데, 수도교는 물의 흐름을 맞추기 위해서 지대가 낮거나 계곡을 통과할 때는 수십 미터 높이로 쌓는 것은 물론,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고 누수가 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하는 당시 최고의 건축 기술과 토목공학의 결정체였다. 수도교는 19세기까지 로마를 비롯한 유럽의 대도시마다 설치한 도시민의 생명줄로서 우리네 농촌에서 논에 물이 부족하면 홈통을 만들어서 계곡물을 끌어온 것과 같은 방식이다.(자세히는 2023. 1. 4. 트레비 분수 참조)

계단에서 바라본 지하궁전
계단에서 바라본 지하궁전

오늘날과 같은 중장비도 없던 1500년 전에 폭 70m, 길이 140m로서 축구장 면적(68m ×105m)보다 넓은 지하를 아파트 3층 높이에 해당하는 9m 깊이를 파는 거대한 저수조 공사에서 당시 식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게 해준다. 이 거대한 저수조를 받쳐준 돌기둥은 소아시아 전 지역의 신전에서 뜯어온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튀르키예 정부는 저수조를 대대적으로 보수한 뒤 1987년부터 일반에게 공개했는데, 이스탄불의 지하 궁전은 현존하는 최대 지하저수조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하궁전 입구
지하궁전 입구

지하 궁전의 입장료는 450터키 리라(한화 약 2만원)이다. 약 50개의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면 지하는 조명이 켜져 있어도 매우 어두컴컴하다. 계단을 내려간 지하저수조의 왼편 구석에는 상인들이 전통의상을 빌려주거나 사진 촬영 등 호객 행위를 하고 있다. 지하 궁전은 약 8만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이라고 하지만, 현재는 식수로 이용하지 않고 관광객을 위하여 수심 1m 높이에 목재로 통행로를 만들어서 저수조를 한 바퀴 돌아볼 수 있게 했다.

지하궁전 저수조 물고기
지하궁전 저수조 물고기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수조에 수위를 파악할 수 있도록 눈금을 새겨두었고, 혹시라도 누군가가 물에 독약을 풀었는지 알 수 있도록 물고기를 길렀다고 한다. 지금도 물고기들이 수조 속을 한가롭게 헤엄치고 있다. 대규모 지하 저장소가 오랜 세월 동안 햇볕이 스며들지 않았는데도 습기나 이끼가 전혀 끼지 않으며, 또 누수도 되지 않게 튼튼하게 건설되었다는 고대의 기술이 놀랍기만 하다. 넓은 지하 궁전은 한 줄에 17개의 둥근 돌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모두 336개가 지탱하고 있는데,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등 다양한 문양의 석주가 여러 지역에서 가져온 것들임을 알게 한다.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보는 돌기둥과 저수조를 바라보는 눈을 화려하게 해준다. 저수조 돌기둥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왼쪽 통로 가장 안쪽에 있는 ‘메두사(Medusa)의 머리’로 주춧돌로 삼은 것이다. 하나는 얼굴을 거꾸로 한 주춧돌이고, 다른 한 개는 옆으로 뉜 모습인데, 이것은 기둥을 세울 때 메두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또 기둥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 옆에는 셀 수 없는 독사로 변한 머리카락의 괴물 메두사가 웅크리고 앉은 조형물이 약간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이것도 어쩌면 1500년 전보다 훨씬 이의 조각품이었을 것이다.

거꾸로 세워진 메두사의 머리
거꾸로 세워진 메두사의 머리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바다의 신 폰토스와 케토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머릿결이 곱기로 소문난 아름다운 처녀였지만, 자신을 아테네 여신의 미모와 견주다가 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고 어금니는 멧돼지처럼 변하고, 아름답던 머리카락은 무수한 독사로 변한 괴물이었다. 게다가 메두사와 눈이 마주치는 사람은 모두 돌로 변해 버려서 수많은 영웅이 괴물 메두사를 처치하러 갔지만, 모두 돌로 변해버렸다.

웅크리고 있는 메두사
웅크리고 있는 메두사

한편, 아르고스(Argos) 왕 아크리오스는 딸 다나에(Danae)가 낳은 자식이 자기를 죽일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청동 탑에 가뒀지만, 제우스가 몰래 들어가 정을 통하고 아들 페르세우스(Perseus)를 낳았다. 아크리오스는 차마 딸과 아기를 죽이지 못하고 궤짝에 넣어서 바다에 버렸는데, 궤짝은 바다를 떠돌다가 세리토스섬에 도착했다. 세리토스섬에서 살던 다나에 모자는 어느 날 폴리덱테스 왕이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왕은 페르세우스를 없애고 다나에를 차지하려는 속셈으로 페르세우스에게 메두사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페르세우스에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신발을 빌려주고, 아테나 여신은 자신의 방패 아이기스(Aigis)를 빌려주어서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에게 몰래 다가가 그녀의 목을 쳤다. 목이 잘린 메두사의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땅에 스며들어 날개 달린 천마(天馬) 페가수스(Pegasus)가 태어났다고 한다.(메두사에 대해서는 2023. 5. 24. 시뇨리아 광장 참조)

이후 메두사의 목은 아테네 여신의 방패에 장식품이 되었는데, 아테나 여신의 방패에 메두사의 얼굴이 매달린 방패는 어떤 창으로도 뚫을 수 없는 천하무적의 상징이어서 ‘아이기스 방패’ 라고 했다. 가죽 바탕 중앙에 바다의 괴물 고르곤(Gorgon)의 목을 배치하고, 많은 뱀의 머리로 장식하는 아이기스는 오늘날 미국의 첨단 잠수함과 군함(Aegis Ship)의 상징이자 이름이 되었다. 또.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 스타벅스의 로고도 메두사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한다.

이스탄불 시내 수도교
이스탄불 시내 수도교
지하궁전을 환하게 비추는 조명들
지하궁전을 환하게 비추는 조명들
저수조 위 보행자 통로
저수조 위 보행자 통로
지하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코린트식 석주
지하궁전을 떠받치고 있는 코린트식 석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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