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얄개전' (1965, 위), '고교얄개' (1977. 아래). 사진=한국영상자료원DB

연예인들의 예명(藝名)사용이 예전 같지 않아 보인다. 아이돌 그룹 같이 여러 명이 활동할 경우에는 상징적인 이름을 내걸어야 하겠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항렬자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고 감각적인 이름을 쓰기 때문에 굳이 따로 예명을 쓰지 않아도 연예활동과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듯싶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 적절한 예명의 사용이 불가피할 수도 있는데 특히 국제무대에서 외국인들이 발음하기 어려운 우리말 이름은 상당한 제약이 된다.

문인들은 필명(筆名)을 쓰는데 이 역시 1970∼80년대 이후 등단한 분들은 필명을 사용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필명하면 이상, 김소월, 박화성, 정비석, 김영랑, 박목월, 신경림, 김현, 윤후명 같은 분들이 오래 기억에 남는지 모른다. 특히 자신의 작품성향과 어울리는 필명은 더욱 인상적이다.

조흔파 (1918∼1980) 선생은 아나운서, 기자, 교사, 공무원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며 습득한 경륜과 타고난 감각으로 ‘명랑소설’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개척한 작가이다. 지금의 관점과 기준으로 본다면 웃음과 공감, 여운의 강도와 평가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6.25전쟁 상흔이 채 가시지 않았던 1950년대에는 조금의 유머. 해학과 여유도 깊은 파장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흔파(欣坡). 흔쾌, 유쾌한 언덕이라는 필명처럼 조흔파 선생의 다양한 작품 가운데 ‘얄개전’은 단연 대표적인 명랑소설로 꼽힌다. 1950년대에 창간되어 수십 년 간 여러차례 폐간과 속간을 거듭했던 학생잡지 월간 ‘학원’은 당시 10대들의 대표적인 문화채널, 감성매체였다. ‘학원’에 1954년 5월부터 1955년 3월까지 연재된 ‘얄개전’은 명랑소설의 고전이 되었다. 별다른 읽을거리, 볼거리가 없었던 당시 이 잡지의 인기는 대단했다는데 1954년 7월호 잡지는 무려 8만부가 팔린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무골호인 대학교수의 막내아들 얄개, 나두수는 말썽꾸러기 사고뭉치 중학생으로 그가 벌이는 기행과 소동은 마침 미션스쿨 외국인 교장선생님의 너그러운 훈육방침에 힘입어 지속될 수 있었다. 당시 기성질서와 규범에 나름 반기를 든 얄개의 행위는 가령 종을 울려 수업을 일찍 끝나게 하거나 잠자는 친구의 안경에 붉은 색을 칠하고 ‘불이야’를 외쳐 깜짝 놀라게 하는 행위 등이 웃음을 유발했지만 사안과 관점에 따라서는 중대한 범죄행위로 연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사회분위기와 주변의 너그러움에 힘입어 성장과정의 진통, 해프닝 차원에 머물렀다.

‘얄개전’은 소설, 만화, 라디오 드라마, 연극 그리고 여러 차례 영화로 제작되어 하나의 원안이 다양한 문화상품으로 연결되는 이른바 ‘원소스 멀티유즈(O.S.M.U)’의 원조로 꼽힐 만하다. 1965년 ‘얄개전’ (얄개역: 안성기) , 1977년 ‘고교얄개’(얄개역: 이승현)로 영화화되었는데 특히 ‘고교얄개’ 이후 ‘여고얄개’, ‘대학얄개’, ‘신입사원 얄개’, ‘장닭 고교얄개’ 같은 비슷비슷한 유형의 영화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계기가 되었다.

이즈음 청소년들의 비행과 범죄행태에 견주어 보면 순진한 고전차원이라 할 만 하겠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사고뭉치 얄개의 이런 행각, 저런 일탈은 잊혀져가는 시절의 풍속화로 투영된다. 팍팍한 세상, 날로 거칠어지는 사회에서 ’얄개전‘이 새삼스럽게 생각나는 것은 철부지 장난에 대한 향수일까. 종국에는 개과천선하는 얄개의 훈훈한 성장담이 지금은 드문 현실인식에서인가. 또는 얄개 같은 10대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아쉬움에서 그러할까. <한남대 프랑스어문학전공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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