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중후반 추정 어금니 2점 출토
웅진기 유일 10대 왕 ‘삼근왕’ 추정
유리·옥 1000여 점 수습…교역 왕성
“정치적 혼란기에도 국정운영 안정”

충남 공주 왕릉원의 무덤 가운데 2호분의 주인(피장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나왔다.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백제가 공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 538년까지 재위한 웅진기 왕들의 묘가 모여있는 왕릉원에 대한 재조사 결과를 17일 발표했다. 국가유산청은 웅진 초기부터 굳건한 정치체계와 활발한 대외교역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유물들과 왕실의 돌방무덤 구조와 묘역 조성 과정을 확인했다. 특히 2호분에서 화려한 금 귀걸이와 함께 출토된 어금니(2점)에 대한 법의학 분석결과 10대 중후반의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2호분 주인은 개로왕(21대)의 직계 후손 중 유일한 10대 왕이었던 삼근왕(23대, 477~479년, 개로왕 손자)으로 추정된다는 결론도 얻었다. 백제 웅진기는 문주왕이 한성(서울)에서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475년부터 성왕에 의해 사비(부여) 천도가 이뤄진 538년까지 63년간의 시간을 말한다.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 성왕 등 다섯 왕이 웅진에서 전열을 정비하고 찬란한 예술문화를 꽃피웠다.

부여문화유산연구소는 2023년 1∼4호 무덤을 재조사하던 중 2호 무덤에서 어금니로 추정되는 치아 2점과 뼛조각 일부를 발굴했다. 법의학적 분석 결과 이 치아는 10대 중후반의 것으로 추정됐다. 이우영 가톨릭대 해부학교실 교수는 “치아의 형태나 마모의 정도 등으로 미뤄 20대가 되기 전 10대 연령으로 추정된다”고 자문했다. 이 같은 자문결과와 웅진기 왕위 계승도 등을 종합적으로 볼 때 2호 무덤의 주인은 삼근왕일 가능성이 높다고 부여문화재연구소는 판단했다. 또 2호 무덤의 피장자가 삼근왕이라면 1호 무덤은 삼근왕의 아버지인 문주왕의 무덤이고 3호와 4호는 문주왕과 삼근왕의 혈연관계에 있는 왕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1호 무덤은 왕릉원 동편 맨 끝에 있고 1호 무덤과 다소 간격을 두고 2∼4호 무덤이 나란히 배치된 것으로 미뤄 이 같은 추론이 설득력을 얻는다고 연구소 측은 설명했다. 연구소 측은 다만 법의학적 판단 만으론 2호 무덤의 피장자가 삼근왕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는 데 동의하면서 시간을 두고 보다 명확하게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하기로 했다. 현재로선 2개의 치아 가운데 하나를 측정이 가능한 형태로 부수는 방법이 유일한데 이를 위해선 의견 수렴을 통한 정책적 결정이 필요하다고 부연했다.

연구소는 또 이번 조사를 통해 웅진 초기에도 백제의 대내외 정치체제는 굳건히 유지됐다고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왕릉원에 있는 1~4호분 중 특히 2호분에서는 화려한 유물들이 대거 출토됐는데 2호분에서 출토된 청색의 유리옥이 달린 정교한 금 귀걸이의 경우 백제 초창기인 한성기의 귀걸이와 웅진 후반기(무령왕릉)의 왕비 귀걸이의 중간 형태로 보임에 따라 2호분에 묻힌 왕은 웅진 초기에 재위한 사실과 함께 당시에도 백제 왕실은 이미 높은 수준의 금세공기술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연구소는 여러 종류의 유리 옥 1000여 점을 수습했는데 여기서 웅진 도읍 초기에도 대외 교역망이 잘 유지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고 밝혔다. 황색과 녹색 구슬에 사용된 납 성분은 무령왕릉과 동일하게 산지가 태국으로 분석되는 만큼 당시 동남아시아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교역망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게 연구소의 판단이다.
연구소는 또 한성기에서 웅진기로 이어지는 백제 왕실 무덤은 내부 벽면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 강 자갈(하천에서 채취한 자갈)을 채웠다는 점도 확인했다고 강조했다. 조사 결과 왕릉원에 있는 1~4호분의 묘역 조성과정을 보면 사전에 수립한 계획에 따라 경사면을 깎아내 완만하게 조정한 다음 가장 동쪽부터 순서대로 조성했다. 또 지하에 만들어진 굴식 돌방무덤(돌방 앞쪽에 복도와 같은 출입구를 설치한 무덤)은 네 벽이 급격히 좁아져서 천장을 돌 한 장으로 덮는 궁륭식(穹窿式) 구조였으며 내부 벽면에는 모두 석회를 바르고 바닥에는 30㎝ 두께로 강 자갈을 채워 넣은 공통점이 있다.

황인호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장은 “그동안 정치적으로 혼란기로만 인식된 웅진기 전반부터도 백제는 이미 내부 정치체제와 대외 교역망을 잘 유지하며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발판으로 웅진 후반기에 속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更爲强國, 삼국사기 기록)’을 선언할 수 있었고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겨 한층 성숙한 문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현재 공주 왕릉원에선 7기의 무덤이 확인되는데 이 가운데 무덤의 주인이 명확하게 드러난 건 무령왕릉(7호분)이 유일하다. 1971년 6호분 주변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됐는데 여기서 무덤의 피장자와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백제 왕의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그래서 한국 고고학계 최고의 성과를 안겨다 준 유적이기도 하다. 왕릉원 고분군은 1∼4호기와 무령왕릉 등 나머지 무덤이 두 부분으로 나뉜 형태를 보인다.


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