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현, 임진왜란 때의 절신으로 유명

‘송세림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고 송세형은 명종때 위사공신(衛社功臣,1546년 대윤(大尹)을 제거하고 명종즉위에 세운 공)에 오르고 대사헌(大司憲:백관을 규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던 사헌부의 종2품 검찰총장)을 지내고 호조판서(戶曹判書:정2품장관), 이조판서(吏曹判書:이조는 문관의 선임과 훈봉, 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褒貶:칭찬함과 나무람. 시비선악을 평정함)에 관한 일을 맡아봄. 정2품 장관)를 역임했다.
송상현(宋象賢,1551~1592)은 임진왜란때의 절신(節臣)으로 유명하다.
그는 1576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벼슬을 거쳐 1591년 동래부사(府使,정3품수령)가 됐다. 다음해인 1592년 4월 15일 2만여 명의 소서행장(小西行長)군은 동래읍성을 점령했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동래읍성 전투에서 조선군은 주장(主將)이였던 송상현 동래부사와 함께 3000여 명 이상이 전사했으며, 50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이같은 사실은 1594년 경상병사 김응서의 기록에 적장이 송상현의 순절 사실을 전달했다고 하며,1594년 조경남(1570~1641)의 난중잡록 권2(갑오10월 11일)에 나와 있다.
당시 송상현 동래부사와 동래읍성, 그 외 동래부지역의 전투 참여자들 기록이 부분적으로 수집돼 1768년 엄린에 의해 ‘충렬사지’로 집대성됐다.
전투가 끝난지 176년이 지나서 종합 정리된 것이라고 한다.
송상현의 묘와 신도비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 강촌 산 1-1번지에 있고, 충북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됐다. 또한 2011년 4월에는 ‘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됐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충적을 기리어 이조판서(정2품장관)의 관직을 내리고, 충렬사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했으며 충신문을 세웠다. 수의동 강촌 묵방산에 자리잡은 이 묘는 원래 동래에 있던 것으로 1610년(광해군 2)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위에는 상석과 문인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묘의 오른쪽에는 비석이 놓여 있다.
묘소 입구에는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는데, 송시열이 글을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글씨를 썼다.
송상인(宋象仁,1569~1631)은 1605년 증광시(나라에 경사있을 때 기념으로 보던 과거)의 병과로 급제해 여러벼슬을 거쳤다.
55세때인 1624년에는 선유어사(宣諭御史, 왕의 명령받아 지역을 선유하던 어사)로 함경도지방에 판견되기도 했다. 인조때 암행어사(暗行御史:왕명으로 특별한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나가던 임시직 관리, 어사또)를 거쳐 부사(府使:정3품)를 역임하고 관찰사(觀察使:종2품 감사) 등을 지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