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구간 두메마을길의 두메마을

광활한 대청호반을 따라 형성된 대청호오백리길, 이 길의 궁극의 지향점은 ‘힐링(healing)’이다. 지친 도시민의 마음을 자연의 힘으로 치유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대청호오백리길이다. 이곳엔 삶의 쉼표가 있고 인생의 느낌표가 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대청호 너른 호수에 쏟아낸 삶의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다. 하늘을 닮은 푸른빛 대청호와 대청호를 품은 오백리길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면 치유의 에너지가 온몸에 전율처럼 흐른다. 대청호의 시간을 간직한 산들산들 바람은 오감을 깨우고 두 팔 활짝 펴고 대청호를 품에 안으면 그 자체로 ‘힐링 샤워’다. 대청호는 그렇게 자신을 찾은 이의 지친 몸과 마음을 토닥토닥 보듬는다.

#. 두메마을 사람들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의 끝자락, 경주김씨(慶州金氏)와 동래정씨(東萊鄭氏)의 집성촌인 이현동 두메마을엔 지금도 30여 가구가 남아 오순도순 삶의 터전을 일구고 있다. 40여 년 전 대청댐이 조성되고 이로 인해 마을 일부가 수몰돼 마을 사람 대부분이 떠났지만 수몰의 흔적에서 빗겨간 이들은 남아 추억을 벗삼아 삶의 희망을 이어나가고 있다. 세월이 흘러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는데 이따금 도시에 사는 자식들이 짬을 내 찾아와 농사도 돕고 마을도 가꾼다. 이곳은 산골짜기 마을인 탓에 계단식 논밭이 발달해 있다. 층층이 이어지는 다랑논이 이 동네의 운치를 더한다.

이현동은 배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산골짜기 작은 마을로 심곡마을과 이현마을로 나뉜다. 배산 아래 갈밭에서 심곡으로 넘어오는 고개를 배고개라 했는데 배산과 이 고개의 이름을 따 이현동이 됐다. 배나무 이(梨)와 고개 현(峴)자를 음차한 거다. 2000년대 들어 이현동이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되면서 ‘두메마을’로 불리기 시작했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현동을 지칭하는 대명사처럼 사용된다.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이 ‘두메마을길’로 명명된 것도 이 마을의 명성 때문이다.

#. 이현동 1번지

대청댐물문화관에서 시작하는 대청호오백리길 1구간은 이현동 거대억새습지에서 마무리된다. 대청호 너머 청남대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조망하면서 등산로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비밀의 숲’에 도달하고 조금 더 가면 대청호 홍수조절을 위해 2012년 새롭게 조성된 비상여수로댐과 로하스가족공원 오토캠핑장을 만나게 된다. 비상여수로댐 위를 가로질러 다시 호반을 따라 걸으면 이씨·민씨·강씨가 모여사는 삼정동 마을을 차례로 지나게 된다. 대청호수길 도로를 끼고 잘 조성된 데크길을 걷다보면 왼편으로 푸른 대청호가 넘실거린다. 덕골을 지나 산줄기를 휘돌아나가면 갈전동을 만난다. 갈전동은 예전부터 갈대밭이 많아 갈대가 무성한 동네라는 의미의 ‘갈밭’으로 불렸으며 곳곳에 칡도 많아 칡 갈(葛)자를 써 ‘갈전(葛田)’이라는 지명을 얻게 됐다. 다시 한 숨 돌리고 대청호반을 따라가면 여수바위길을 지나고 데크가 설치된 호수 둘레를 걷다 보면 이내 1구간의 종착지인 두메마을 거대억새습지에 도달한다.

두메마을 거대억새습지.
두메마을 거대억새습지.

이 억새습지는 두메마을의 광장과도 같은 곳이다. 마을의 역사가 이곳에서 이어지고 또 새로운 문화가 이곳에서 싹튼다. 그래서 억새습지공원이 ‘이현동 1번지’다. 실제 주소가 그렇다. 억새습지공원의 전체 면적은 2만 6186㎡, 약 8000평에 달한다. 억새와 노랑꽃창포, 삼백초, 수련 등 수생식물 군락이 조성돼 있고 버드나무 군락은 대청호와 접해 있다. 밑동이 잠긴 버드나무 군락은 언제 봐도 신비롭다. 물안개라도 피어오르면 가히 환상적이다. 이 공원은 마을과 대청호 사이에 존재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는데 마을에서 대청호로 빠져나가는 배오개천의 물이 이곳에서 자연정화 된다. ‘느림의 미학’에서 힐링의 원천을 찾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다.

#. 랜드마크 ‘하늘강 아뜰리에’

두메마을의 중심부엔 도자기를 빚는 공방 하나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예사롭지 않게 잘 다듬어진 조경수와 풀꽃들의 조화로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하늘강 아뜰리에’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이 공방은 신정숙 작가의 삶터다.

신 작가가 두메마을에 정착한 건 20여 년 전이다. 30대 중반의 나이, 도시의 삶에 찌들어 뭔가 인생의 전환점이 필요했을 때 두메마을,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의 하늘강 아뜰리에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당시 이곳은 작은 암자였는데 잘 가꿔진 정원이 먼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찰나의 순간, 신 작가는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듯 자연에 묻혀 살아가는 인생 2막의 영감을 얻었다. 곧바로 작업실을 꾸미고 정원도 가꾸기 시작했다. 예술가의 감성이 고스란히 스며든 하늘강의 정원은 그 자체로 작품이 됐다. ‘대전시 민간정원 1호’의 타이틀이 괜히 부여된 게 아니다. 많은 이들이 신 작가의 도자기 작품을 감상하고 직접 도자기를 빚기 위해 이곳을 찾지만 대부분 예술적으로 빚어진 아기자기한 정원에 먼저 마음을 빼앗긴다.

두메마을에서의 신 작가의 삶은 처음엔 그리 순탄치 않았다. 꿈에 그리던 공방을 갖게 됐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떨쳐낼 수 없어 도심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만큼 새 둥지를 튼 동네사람들과 융화될 수 있는 시간은 늦춰졌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신 작가는 시어머니 덕을 봤다. 신 작가는 두메마을에 정착할 때 시어머니를 모시고 들어왔는데 신 작가의 역할을 시어머니가 대신했다. 그렇게 하늘강 아뜰리에는 두메마을의 새로운 사랑방이 됐고 신 작가도 외지인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다 인정하는 ‘이웃’이 됐다.

#. 예술 마을의 탄생

두메마을에선 발길이 닿은 곳곳에 미술작품들이 촘촘하게 설치돼 있다. 마을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이고 전시관이다. 예술마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많은 작가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과 함께 작품활동을 한 결과다. 인적이 드문 외진 산골짜기, 말 그대로 두메마을이 이렇게 변신한 건 신 작가가 ‘공정관광’에 눈을 뜨면서다. 신 작가는 치유미술, 환경미술에 늘 관심을 가져왔는데 이 특기를 관광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결과물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신정숙 작가(오른쪽).
신정숙 작가(오른쪽).

신 작가는 마을사람과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을 조직하고 대전관광공사와 대덕구,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등 공공기관의 지원이 뒷받침되는 프로젝트들을 시행했다. 수리가 필요한 농기계들만 쌓였던 마을창고는 예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이자 마을기록관(박물관)이 됐고 집 담장이며 울타리, 옹벽엔 어김없이 작품들이 자리를 잡게 됐다. 마을 어르신들이 하늘강 공방에서 직접 빚은 도자기 작품들도 상당하다. ‘농부가 예술로 사는 마을’은 이렇게 시동을 걸었다.

작품들의 주요 콘셉트는 ‘감돌고기가 노니는 마을’이다. 감돌고기는 멸종위기종이자 대전의 깃대종인데 환경보존의 가치에 대한 공감대를 넓혀가자는 바람에서 신 작가는 감돌고기를 형상화 하는 데 주력했다. ‘이현동 1번지’ 억새습지공원에 자리잡은 감돌고기 스토리 조형물이 대표적이다.

억새습지공원의 감돌고기 스토리 조형물
억새습지공원의 감돌고기 스토리 조형물

이 작품은 신 작가의 남편이기도 한 조윤상 작가의 작품인데 구름, 비, 벚꽃, 바람, 파도 등을 상징하는 조형물에 도자기 풍경을 달았는데 이 풍경들은 두메마을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각자의 소망을 담아 만든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은은한 풍경소리가 수몰로 인해 마을을 떠나게 된 이주민들과 환경오염으로 하천을 떠난 감돌고기를 소환해 위로했으면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 자연의 순환 과정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 속에서 잠시 쉼을 청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신 작가는 마을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마을기업(더맑은이현마을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 일환으로 마을에 있는 식당(더맑은 초가랑)을 하나 인수해 운영 중이다. 이 식당 역시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초가집 한 켠에 담배건조장이 비교적 잘 보존된 형태로 남아 있다. 오랜 기간 담배농사는 이 마을의 주요 경제 수입원 중 하나였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차철호·김동직 기자

신정숙 작가는 마을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마을기업(더맑은이현마을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 일환으로 마을에 있는 식당(더맑은 초가랑)을 하나 인수해 운영 중이다.
신정숙 작가는 마을 프로젝트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2020년 마을기업(더맑은이현마을협동조합)도 만들었다. 그 일환으로 마을에 있는 식당(더맑은 초가랑)을 하나 인수해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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