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년, 확대된 독립의 의미
일반적인 주권문제서 벗어나
세대·계층 갈등 해소에 집중
강한 나라보다 ‘건강한 사회’
공동체 회복으로 인식 전환

광복 80년, 해방의 시간은 이제 한 세기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숫자 앞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과거의 해방을 기념하기보다 오늘의 불안을 되새긴다. 우리는 외세로부터의 해방은 이뤘지만 서로를 향한 불신과 단절 속에 다시 갇혀 있다. 국민이 바라는 독립은 더 이상 주권의 경계 문제만이 아니다. 사라진 대화, 느슨해진 연대,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는 일을 독립으로 본다.

◆‘독립’의 재정의
국무조정실과 광복80년기념사업추진기획단이 지난 4월 전국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민인식조사는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에서 멈췄고 어디서 다시 출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응답자들이 가장 시급한 국가 과제로 꼽은 건 ‘저출생·고령화 대응’(32.4%)과 ‘세대·계층 간 갈등 해소’(31.5%)였다. 기술, 안보, 외교보다 우선된 이 응답은 공동체 내부의 위협이 외부의 적보다 더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국민이 말하는 독립은 외세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사회 내부의 균열과 불신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는 일이 된 것인데 가족이 사라지는 사회, 대화가 멈춘 공동체에서 국민이 생명을 잇고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국가의 가장 시급한 책무로 보고 있다는 얘기다.

반면 ‘첨단기술 기반 기술 강국 실현’(10%), ‘한반도 평화 정착’(7.6%), ‘국제사회 위상 확립’(6.4%),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 진입’(4.8%), ‘기후위기 대응’(4.5%) 등 전통적이던 국가의 전략들은 국민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속도를 강조하는 정책의 언어와는 달리 국민은 방향을 묻고 있는 것이다. 더 강한 나라보다 더 건강한 사회, 더 많은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인식의 전환이 시작된 셈이다.

◆정치 없는 자부심, 단절된 오늘
정치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더 냉정했다. 정치 발전에 만족한다는 응답은 15.1%에 불과했고 불만족한다는 답변은 83.5%에 달했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면 정치 분야는 21.4점에 그쳤다. 문화(66.2점), 경제(46.7점), 사회질서 안정(43점)과 비교해도 현격히 낮다. 유일하게 신뢰보다 불신이 압도한 영역이 정치였는데 그만큼 정치가 공동체로부터 가장 멀어진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국민이 가장 시급하다고 느끼는 인구 구조 문제와 사회 갈등 해소는 정치가 해결해야 할 영역이지만 그 역할을 수행할 역량이나 의지를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현재의 민심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향한 국민의 자긍심은 또렷해졌다. ‘우리 역사가 자랑스럽다’는 응답은 90.6%로 광복 60년(69.1%)과 70년(83.3%)보다 높았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라는 응답도 27.8%로 2015년(8.2%) 대비 3배 이상 증가했다. 정치와 역사에 대한 어긋난 결과는 국민이 과거에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그 긍정이 오늘의 시스템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빛나는 과거와 불투명한 현재 사이의 단절은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았다.

이 같은 불균형은 ‘어떤 나라가 되길 바라는가’라는 질문에서도 드러난다. ‘민주주의가 성숙한 나라’(24.8%)가 가장 많은 선택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와 ‘사회질서가 안정된 나라’가 각각 19.1%로 뒤를 이었다. ‘남·북한이 통일된 나라’는 9.3%에 머물렀다. 통일이 더 이상 절대적 과제가 아니라는 꽤 의미심장한 결과다.

◆기억보다 공감 먼저
흥미로운 사실은 이런 분명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올해가 광복 80주년임을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과반수(52.3%)가 ‘지금 듣고 알았다’고 답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의미에 대해 묻자 81.2%가 ‘의미 있다’고 평가했다. 광복이라는 기념일 자체가 아니라 기념 방식에 대한 거리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광복 80년을 기념할 사업으로 가장 많은 응답이 나온 항목은 ‘독립운동가 선양사업’(35.2%)이었다. ‘국민 참여형 프로그램’(22.2%), ‘문화예술 축제’(18.3%) 순인데 기념사업의 목적으로는 ‘국민 화합과 공감대 형성’(31.1%)이 최우선으로 꼽혔다. 국민은 그저 과거를 떠올리는 행사보다 오늘의 공동체를 다시 잇는 기억의 장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조사는 시대의 분위기만 기록하진 않는다. 인구 절벽, 갈등 사회, 정치 불신이라는 세 개의 단어가 맞물려 우리 사회가 당면한 구조적 위기를 통계적으로 보여주는 경고다. 특히 정치의 공백은 사회 전체의 회복력을 저해하는 근본 원인이라는 점에서 국민은 국가 시스템의 작동 여부를 되묻고 있다. 광복 80년, 국민은 나라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그 질문 앞에 정치가 계속 침묵한다면 진짜 위기는 이제부터다.

이번 조사는 광복80년기념사업추진기획단이 리서치랩컨설팅에 의뢰해 지난 4월 24일부터 27일까지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면접원을 활용한 전화조사(CATI) 방식으로 실시됐고 응답률은 10.4%이고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2.5%p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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