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인 자활 공동체 벧엘의 집 홈리스 풍물패 '보석같은 남자들'
원용철 목사, 마당극패 우금치와 "절망 딛자" 풍물교육
악기 잡은 두 손엔 부활의 희열 "매 순간이 아름다워"

그가 몸을 실은 건 부산행 석탄열차였다. 역무원들의 눈을 피해 가까스로 올라탔다. 배가 너무 고팠다. 10여 년 의탁했던 고아원을 무작정 나오게 된 이유다. 부모는 일찍이 죽었다고 들었다. 1970년대 모두가 헐벗은 시절, 고아원엔 먹을 게 많지 않았다.
날 반겨줄 곳은 어차피 없었다. 내려 보니 대구역. 거리를 쏘다니다 다마(전구)공장 하나가 눈에 띄어 거기서 한뎃잠을 잤다. 배가 고팠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 하나를 손에 쥐자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꿈일까. 한 입 먹으려던 찰라 옆구리가 욱신해졌다.
꿈이 아니다. 빵을 훔친 대가는 가혹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모르겠다. 그때다. 발길질이 멈춘다. 좀 있어 보이는 한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분은 날 집으로 데려가 먹이고 재웠다.
그 분이 운영하는 라면공장에서 일을 하게 됐다. 하지만 오래지 않았다. 일이 서툴렀고, 배달사고가 잦았다. 아저씨는 날 견디지 못했다. 그냥 발길 닿는 곳, 서울로 올라갔다. 나의 10대는 그랬다.
한동안 허공을 향해 있던 그의 눈이 기자를 향했다. 저 빛나는 것이 눈물인가… “내 살아 온 얘기 다하려면 끝이 없을 거요. 언제 다 듣고 앉아 있겠수. 이만 합시다.” 56세 노숙인 김 씨는 쓸쓸한 웃음을 지었다.
#. 이야기 둘.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선 게 화근이었다. 뼈 빠지게 일해 돈을 벌어도 소용없었다. 윗돌 빼서 아랫돌 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악순환의 연속.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집사람과 아이들도 덩달아 빚쟁이에 시달려야 했다. 가족들을 위해 떠나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왔고 곧이어 아내와 이혼했다.
나도 한땐 남부럽지 않은 ‘사장’이었다. 전국을 떠돌며 배운 중국요리 기술로 주방장이 됐고 내 가게도 하나 냈다. 당시엔 늦은 나이 서른에 아내를 만나 살림을 차렸다. 고속버스가 처음 다니던 그땐 나도 뻥 뚫린 고속도로처럼 잘 나갔다.
하지만 장사가 좀 되려고 하면 주인집에서 가게를 비워달라고 했다. 권리금에 임대료 내가면서 피땀 흘려 키워놓은 터인데… 있는 놈들은 꼭 돈xx을 하고 싶어 했다. 하긴 주인집 입장에선 얼마나 배가 아프고 탐이 났겠나. 어디다 하소연도 할 수 없었다. 비워달라니 비워줄밖에.
그렇게 정든 고향 금산을 떠나 전라도로 갔다. 광주에서 한 5년 중국요리집을 운영했다. 1980년 5월, 군홧발에 산산이 부서지고 짓밟히던 금남로의 질곡도 잊히지 않는다. 무서워 밖을 나가지 못했다. 아이들과 아내가 무사한 데 감사할 뿐.
그렇게 머물다 흐르고 흐르다 머무는 게 인생이런가. 일흔 줄에 접어든 나이, 나는 밖에서 노숙인으로 불린다. 회한이 왜 없겠는가. 자식을 둔 아비로 어찌 그리움과 애틋함이 없겠는가. 신 씨(71)는 그러나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더 있겠느냐”며 “몸이 허락하는 한 봉사활동이나 하며 살다가 고통 없이 죽고 싶다”고 말했다. 자글자글 주름 잡힌 그의 얼굴엔 망팔(望八)의 미련일랑 없어보였다.
#. 그리고 다시 이야기 셋.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주섬주섬 뭔가를 챙긴다. 예배당 한 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물함에서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이 낯선 남자들이 어느새 풍물패로 변신했다.
어떤 이는 덥수룩한 머리에 고색창연한 고깔을 뒤집어썼고, 또 어떤 사람은 입고 있던 옷에 민복을 껴입고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더거리 위에 삼색띠를 둘러맨 이가 제 것인 양 꽹과리를 잡자 무리들도 각자 하나씩 징에 장구며 북을 잡아든다. 악기를 들고 있는 모양들이 제법 각은 나온다. 그래도 어딘가 허술하고,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이는 이들은 누굴까.
그들의 이름은 ‘보석 같은 남자들.’ 대전 동구 정동에 있는 노숙인 자활공동체 ‘벧엘의 집’의 노숙인들로 구성된 풍물패다.
노숙인과 풍물. 이 뻘쭘한 조합은 지난 4월 벧엘 노숙인들의 이야기를 마당극으로 꾸며보겠다는 당찬 포부로 만들어졌다. 일을 벌인 건 벧엘 원용철 목사였다. 벧엘 노숙인들의 자립·자활이 가장 큰 목표지만 그보다 노숙인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고 이를 통해 삶의 의지를 다시 불태우길 원 목사는 바랐다.
노숙인 풍물패 만들기엔 대전지역 마당극패 ‘우금치’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벌써 30회 넘게 교육을 진행해 온 우금치 이광백·이상호 단원은 “벧엘의 집에서 교육 제안을 받았을 땐 교육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걱정이 많았다”며 “교육 참여자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면서 애초 계획했던 마당극은 접고 판굿 형태의 지신밟기로 교육목표를 수정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현재 그분들의 풍물 수준이 높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실제 공연을 경험하며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조금씩 미소가 번지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이분들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고 두 단원은 첨언했다.
원 목사는 감격 그 자체다. “무슨 장단인지 엇박이 나고 춤사위가 뻣뻣하면 어떠냐”며 “우리 사회의 그늘진 구석에서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못 내던 노숙인들이 그들의 소리를 만들어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라고 원 목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보석 같은 남자들도 짐짓 자신들의 변화를 놀라워하는 눈치. ‘이 나이에 무슨 욕심이 더 있겠느냐’던 신 씨 할아버지는 상쇠를 욕심내고 있다. 지금은 풍물공연의 두미(頭尾)를 알리는 징을 맡고 있지만 더 연습해 꽹과리를 잡아보고 싶다는 것.
20년 가까이 스무 마지기 농사를 졌다는 이 씨(63)는 농사꾼답게 풍물이 손에 익었고, 74세 김 씨 할아버지는 나이가 무색하게 힘이 좋아 북을 치고 있다. 경남 언양 출신 강 씨(61)는 성주풀이와 한오백년 등 타령을 잘 부르고 좋아해 보석 같은 남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남자다. 경기도 화성에서 난 장 씨(68)는 “풍물은 하면 할수록 재미가 붙는다”고 했고, 장구를 맡은 막내 원 씨(49)는 “형님들과 어울려 악기를 치고 공연도 함께 하게 돼 좋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고아원 등에서 허기진 세월을 살아 온 김 씨는 패원들 사이에서 장구 리듬을 잘 타기로 유명하다. 김 씨는 “원래 음악을 좋아해서 그런가보다”고 순순히 칭찬을 받아들인다. 그래도 그의 십팔번은 ‘마른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시며’…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다. 그에게서 조용필 노래 150곡 정도는 언제라도 주크박스처럼 흘러나온다.
적어도 이들은, 날 때부터 노숙인 딱지를 달고 나오는 사람은 없음을 삶의 나이테로 증거하고 있었다. 보석 같은 남자들과 짧은 조우(遭遇)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절정에 오른 12월 칼바람이 거리를 메운다.
지난해 12월 20일 전국노숙인복지시설협회와 전국홈리스연대, 홈리스연구회 등이 발표한 ‘2012 전국 노숙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전국의 노숙인은 모두 1만 3262명으로 이중 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이는 1811명이다. 나머지 1만 1451명은 노숙인을 위한 일시보호시설이나 자활 또는 요양시설에 살고 있었다. 이는 인구 1만 명에 2명이 노숙인인 꼴이며 대전지역은 거리노숙인 89명과 각종 시설 인원 등을 포함해 417명이 노숙인으로 조사됐다.
노숙인 지원의 법적 근거는 2005년 ‘부랑인 및 노숙인 보호시설 설치·운영규칙’이 개정되면서 제도화된 데 이어 2011년 6월 ‘노숙인 등의 복지 및 자립지원에 관합 법률’ 공포로 중대 분수령을 맞았다. 2012년 6월부터 본격 시행된 이른바 노숙인복지법은 노숙인 등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응급조치와 주거, 보호 등 국가 및 지방정부의 책임을 강화한 것이 핵심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는 정부의 노숙인복지법 시행에 맞춰 같은 달 ‘노숙인 권리장전’을 공표했다. 노숙인으로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비롯해 자기결정권, 종교의 자유, 사생활 보호, 주거 및 고용지원을 받을 권리 등 16개 권리가 여기에 담겼다.
특히 노숙인 권리장전은 “노숙은 경제적 빈곤, 이용 가능한 저렴한 주거의 부족 등으로 인해 우리사회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는 위기상태”라며 “노숙인은 우리사회의 일원으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갖는다”고 천명했다.
글 문승현 기자 papa@ggilbo.com·사진 김상용 기자 ace@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