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씨가문의 인재들 '글솜씨·덕행' 명성
풍부한 기지로 '당쟁타파' 공 세우기도
송성명(宋成明,1674~?, 자는 성집,호는 송석)은 1705년 증광 문과에 급제해 이조좌랑(정6품 전랑), 동부승지(정3품), 부제학(홍문관의 정3품), 대사성(정3품), 황해감사(종2품 관찰사), 대사헌(종2품 검찰총장), 1729년에는 형조참판(종2품 법무차관), 공조판서, 예조판서(禮曹判書:예조는 6조의 하나로 예악(禮樂), 제사, 연향, 조빙(朝聘), 학교, 과거 등에 관한 일을 맡은 정2품 장관), 이조판서, 좌참찬(의정부 정2품) 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문명(文名: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높았다. 숙종실록 개수에 참여했으며 저서에 ‘송석헌집’이 있다.
송진명(宋眞明,1688~1738, 자 여유, 호 소정)은 대사성을 지낸 송정명과 예조판서를 지낸 송성명의 동생이고 송인명의 종형이다.
1714년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때 보던 임시과거) 문과(文科,대과)에 급제해 대사헌(大司憲,종2품 검찰총장), 이조참판(參判,종2품 차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종2품 감사)와 호조, 이조, 예조판서(判書:정2품 장관)등을 지냈다. 그는 삼사(三司)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고 청렴강직했으며 학행으로 명성을 떨쳤다.
송인명(宋寅明,1689~1746, 호 장밀헌, 시호 충헌)은 1719년 증광(增廣, 나라에 큰 경사있을때 보던 임시과거) 문과(文科, 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724년 충청도관찰사(종2품 감사), 1731년 이조판서(정2품 장관)가 되어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인재를 두루 등용시키고 당론을 조정·완화해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736년에는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 1740년에는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이르렀으며 탕평책에 더욱 박차를 가해 기강을 바로잡고 당쟁의 타파에 공이 컸다. 그는 기지와 정략이 풍부했다고 전한다.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됐다.
송문재(宋文載,1711~?, 호 행수)는 송익장의 아들로 1746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임금이 성균관의 문묘에 참배하고 보던 대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751년에는 정언(正言, 정6품), 지평(持平, 사헌부의 5품 검사), 1754년에는 교리(校理, 홍문관의 정5품), 1760년 대사간(大司諫, 사간원의 정3품 장관), 1770년 좌승지(左承旨,승정원의 정3품)를 거쳐 함경도관찰사(觀察使, 종2품 감사),1772년 대사헌(大司憲:사헌부 종2품 검찰총장), 1779년 개성유수(留守,종2품지방장관) 등을 지내고,호조참판(戶曹判書:종2품 차관)에 올라 은퇴했다.
한편 정가공파(正嘉公派)에서는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오른 송질(宋帙,1454~1520, 시호는 숙정)과 중종의 부마(駙馬;사위, 부마도위의 약자)인 송인(宋寅), 송문림(宋文琳), 송언신(宋言愼) 등이 가문을 빛냈다. 정가공 송서(宋瑞:1278~1353(충렬왕~공민왕)는 정가공파의 파조로 시호는 정가(正嘉)이고, 송유익(惟翊)의 6세손이다. 중찬(中贊:종1품 정승)으로 치사(致仕;벼슬을 스스로 사양함)한 송송례(松禮)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에 책록돼,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고려 충렬왕때 최고통치기관)의 중찬(中贊;종1품정승)에 이르러 낙랑부원군(樂浪府院君)에 봉군된 송분(宋玢,?~1318)이며, 어머니는 중화김씨(中和金氏)로 호부상서(戶部尙書:정3품장관)를 지낸 김기석(金祇錫)의 딸이다.
1349년(충정왕1) 감찰대부(監察大夫:감찰사(監察司)의 으뜸 정3품 대간(臺諫)벼슬)가 되고, 1352년(공민왕1)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종1품재상), 판전리사(判典理事: 1275년 원(元)나라의 간섭으로 행정기구를 축소개편할 때 문관의 선임, 공훈(功勳), 봉작(封爵) 등을 맡았던 이부(吏部)와 의례, 외교, 교육 등을 맡았던 예부(禮部)를 통합 설치한 전리사의 으뜸벼슬)가 됐다.
뒤에 순성보리익찬공신(純誠輔理翊贊功臣匡)에 책록되고 광정대부(匡靖大夫:종2품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璧上三韓三重大匡:정1품 품계)으로 도첨의우정승(都僉議右政丞:종1품정승)에 올라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식읍(食邑:고을의 조세를 개인이 받아쓰게 하는것) 1000호와 식실봉(食實封) 300호가 내려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