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출발
일제 수탈에 이용된 아픔도 서려
향후 철도 분기역으로 성장했지만
고속도로 시대 개막 후 기능 분산

▲ 일본에서 발견된 일제강점기 최초의 대전역 모습. 대전시 제공

기차는 멈춰 섰다. 심야의 정적을 깨는 기관차의 진동이 어둠을 밀어냈다. 어디선가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누군가는 조용히 대전발 0시 50분 열차에 올랐다. 어디론가 떠나기 위해, 혹은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기 위해 이곳은 늘 그렇게 누군가의 여정을 시작시켰고 또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기다림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플랫폼, 환승과 이별이 포개지는 의자, 그 모든 풍경 속에 대전역은 낮은 목소리로 존재해왔다. 도시의 심장은 언제나 고요한 순간에 가장 크게 뛴다. 대전역, 그 출발의 역에서 우리는 120년의 시간을 되돌아본다.

대전은 기차와 함께 태어났다. 대전이 ‘도시’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1905년 1월 1일 경부선이 개통되고 대전역이 문을 열던 날이었다. 그 전까지 충청의 중심은 공주였고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던 평야였다. 도로도, 광장도, 행정기관도 없던 땅에 기찻길이 놓이면서 도시는 처음 자신의 좌표를 갖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그 이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대전’이라는 지명은 일본군 철도부대가 붙인 이름에서 비롯됐다.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경부선 철도 공사를 밀어붙였고 그 중심 지점에 병참 기지를 만들었다. 대전역은 그렇게 만들어진 인공의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한 마을이 도시로 태어났다.

도시의 심장은 곧 분기점이 된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단계적으로 호남선이 연결되면서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이 만나는 전국 유일의 철도 분기역이 됐다. 열차는 반드시 이곳에 정차했고 사람과 물자, 행정과 시장이 몰려들었다. 관사와 병원, 여관과 우체국, 유곽까지 들어서며 도시의 골격도 짜였다. 철도 위에 도시가 올라선 것이다.

그 이후 대전역은 수많은 이들의 생애 경로가 얽힌 기억의 장소로 변모했다. 피란을 온 가족, 발령받은 공무원, 장정을 떠나는 청년, 기회를 좇는 노동자, 유랑하던 예술가들까지 대전역에서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돌아왔으며 누군가는 그저 그 자리에 앉아 지나가는 시간을 바라봤다. 대전역은 누군가에겐 시작이었고, 누군가에겐 마지막인 공간이었다. 플랫폼마다, 벤치마다, 출구마다 그리움과 망설임은 그렇게 켜켜이 쌓여갔다.

하지만 시간은 공간의 역할을 바꿔놨다. 새마을호가 달리고 고속도로가 열리면서 기차는 더 이상 종착이 아닌 경유의 수단이 됐다. 대전역은 더 이상 목적지가 아니었다. 그러면서 정차하는 이들 속 머무는 이는 줄어들었다. 도시의 상징이었던 역은 점차 생활권에서 멀어졌고 사람들은 그곳을 ‘원도심’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대전역은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1905년 경부선과 함께 처음 모습을 드러낸 그 건물은 여전히 대전의 가장 오래된 장면으로 남아 있다. 도시가 확장되고 기능이 분산된 지금도 대전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를 가장 정확히 말해주는 공간이 바로 대전역이다. 지워진 시간들 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시작의 증거인 대전역은 오늘도 조용히, 단단히, 그 시간을 증언하고 있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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