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전보건환경연구원장

여름이 한창이다. 저만치 보문산의 여름이 하늘과 도심을 조화로이 이어주고 있다. 땅 위의 군상들은 녹음이 짙어졌고 내리쬐는 햇살만큼이나 산새들 조잘조잘 지저귀고 매미 힘차게 울어대는 걸 보니 여름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이다.

뜬금없이 소싯적 여름이 생각난다. 멋스럽고 화려한 추억은 아니지만 여름 하면 잊지 못하는 기억 몇 점은 있다. 그렇다면 호랑이 담배 피우고 곶감이 호랑이보다 무섭다던 그 시절을 소환해 보자. 물론 그곳엔 엄마 아버지가 주인공이셨고 당신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리움을 낳게 해주는 장본인들이셨다. 소환 시점은 등잔불을 밝히던 시절이었고 그때 내가 살았던 뒤꼍은 대나무밭이 안채와 사랑채를 따라 병풍처럼 삥 둘러 에워싸고 있었으며 널따란 마당에 흙 돌담으로 싸리문이 달린 고즈넉한 초가집이었다. 마당에선 검정 개가 꼬리를 흔들며 닭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외양간에선 누런 암소가 평화롭게 드러누워 되새김질할 때마다 워낭소리 딸랑거렸다. 참새들은 널어놓은 곡식이 제 것이라도 되는 양 슬금슬금 곶감 빼 먹듯 대나무밭과 마당을 오가며 분주하게 파닥거렸고, 사랑채 아궁이에서는 아버지가 쇠죽을 끓이시고 부엌에선 엄마가 맛난 음식을 만드시느라 분주하게 달그락거리던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그뿐만이랴! 여름은 나를 알고 있다. 야트막한 산 중턱 길 아래 비탈진 밭 어디쯤엔가 원두막에선 어른들 몰래 개구쟁이들과 참외나 수박을 빠개 먹으며 수다를 떨던 분위기와 달콤 시원한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능수버들 늘어진 골짜기의 시원한 개울이나 방죽에선 동네 형들과 멱을 감고 천렵도 해가며 천방지축 한여름을 지치곤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밤이면 바람 잘 드는 마당 한쪽에 왕겨 모깃불 피워놓고 멍석 위에 돗자리 깔아 누워 부모 형제자매들과 하늘의 별을 세었던 적도 있었으며, 조용한 밤일수록 더 크게 들리는 개구리나 풀벌레 소리를 음악 삼지 않을 수도 없었다. 거기다 그 당시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방송을 했었는데 그 전설 이야기들이 어찌나 무서우면서 재미있었던지 쏟아지는 잠을 애써 참으며 듣다가 잠들곤 했던 기억도 있다.

그렇게 내 개구쟁이 시절은 더운 여름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부모님을 믿고 따르며 근심 걱정 없이 여름 속의 작은 겨울도 있었다. 동네 산과 들과 강으로 얼마나 쏘다니며 까맣게 탔으면 검둥개와 멱감고 왔냔 소리를 들으면서 여름을 더운 줄도 모르며 지내왔다. 그럼에도 개미처럼 일하는 부모님이 계셨다면 나는 당신들의 눈을 벗어나기만 하면 베짱이처럼 놀고먹고 땡땡이치는 날도 수두룩 빡빡했었다. 물론 어리다고 본분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부모님의 음덕으로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어서 슬프고 되돌릴 수 없어서 후회되며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애가 타는 이 마음은 뭘까? 향수일까? 그리움일까? 아니면 과거 기억으로부터 소환일까? 부질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아직도 기억을 붙잡고서 그리움과 싸우고 있는 건 왜일까? 그 당시에는 몰랐으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게 향수고 그리움이란 걸 알았다. 돌아서고 헤어질 때야 섭섭하고 서운했었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잡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잊히면 잊히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가슴에 묻어두고서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꺼내 추억해 볼 수밖에 없음이다.

지난 과거를 가지고 지금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세월의 깊이만큼 낡고 빛이 바래 오래된 흑백사진 같은 그리움이지만 그래도 그 그리움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우리를 과거로 데려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면서 현재를 이어주고 있으니 그리움은 곧 타임머신이 아닐까? 돌아오지 않을 기다림은 아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리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지극히 낭만적이라 생각한다.

석양 노을이 질 때쯤 시골집 굴뚝에선 하얀 연기 모락모락 피어올랐었는데~ 지금이라도 싸리문을 열고 들어가 엄니하고 부르면 “와야 내 새끼”하며 정겹게 반겨줄 것 같은데~ 그땐 왜 그 행복을 몰랐을까? 그때 한 번 더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보고 그때 한 번만이라도 더 엄마를 안아볼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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