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서[(宋瑞, 1278~1353(충렬왕~공민왕)]는 입조(立朝)에 근엄하며 탁연(卓然)한 공훈을 세웠으나 쟁명공탈(爭名功奪)의 무리와는 판이해 왕실부익(王室扶翼)에만 갈충진성(碣忠盡誠)하여 국가존망과 생을 함께 하다가, 1353년(공민왕 2) 76세로 경저(京邸)에서 사망하자 정가(正嘉)의 시호가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선영의 동강(東崗)에 있어 38선 이북에 위치해 후손들이 송서의 아들 판사공(判事公) 송인번(宋仁蕃)과 손자 목사공(牧使公) 송전(宋琠)의 묘소가 있는 충남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에 설단하여 제사지내고 있다.

배위 군부인(郡夫人:태조 5년(1396) 5월, 문무 정1품. 종1품의 처에게 준 작호) 안주강씨(安州康氏)는 봉훈대부(奉訓大夫)로 감문위상호군(監門衛上護軍:정3품)을 지낸 강적순(迪順)의 딸이며, 장남은 봉익대부(奉翊大夫:종2품 문관 하(下)의 품계)로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왕이 타는 말(마필), 궁중의 가마 등을 관장한 관청의 벼슬)를 지낸 송인번(宋仁蕃), 차남은 증이조판서(贈吏曺判書;정2품 장관) 송윤번(宋允蕃), 3남은 전서(典書:정3품 장관)를 지낸 송의번(義蕃)등 3남 2녀를 두었다.

송질(宋軼, 1454~1520, 시호는 숙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가중(可仲)이며, 도정(都正) 송공손(宋恭孫)의 아들이다. 1477년(성종 8)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때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고, 영의정(領議政:정1품 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송질의 묘와 신도비는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15-1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8호에 지정되었다. 비문은 164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성세창이 글을 짓고 김로가 글씨를 썼다. 묘소 부근에는 송질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 ‘숙문사’가 있는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양식의 건물이다.

“송질 셋째딸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라”

송질의 셋째딸은 남양홍씨(토홍)가문으로 시집을 가 홍씨가문 영화의 절정을 이루게 한 어머니이자 아내였다. 중종(中宗) 때 영의정에 오른 남양홍씨 문희공(文僖公) 홍언필(洪彦弼)과 그의 아들 홍섬(洪暹)의 대(代)이다. 홍섬(洪暹)은 선조때 영의정을 세 번 역임하며 명상(名相 )이자 청백리(淸白吏)의 칭송을 들었는데 부자가 정승을 지낸 드문 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그의 어머니 여산(礪山) 송(宋)씨는 중종(中宗) 때 영의정을 지낸 송질의 셋째딸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정승인 ‘세계사상 유일의 복많은 여성’이다.

당시에도 왕비와 대신의 부인 등 상류사회 부인들의 사교 모임이 있었는데, 왕비는 송부인이 나타나면 꼭 일어서서 마중하며 깍듯한 존경을 표했다 한다. 그 까닭을 묻자 왕비는 자신은 남편이 임금일 뿐이지만 송부인은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이 모두 재상이니 어찌 내가 공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고 했다. 송부인은 명문의 여인답게 예의범절에 밝고 부덕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여장부였다 한다.

그녀가 처녀시절 친정아버지 송질은 극성스런 부인의 성격에 골치를 앓던 나머지 딸들도 어머니를 닮으면 큰일이다 싶어 세 딸을 불러 놓고 한마당 연극을 했다고 한다. 딸들 앞에 약을 한 사발씩 내놓고 너희들이 어머니를 본받아 극성을 부리면 다음에 시집을 가더라도 송씨 가문에 누가 미칠 터이니 그럴 양이면 여기 이것이 독약이니 아예 마시고 죽어라고 했더니, 위로 두 언니는 절대로 어머니 같은 극성을 부리지 않겠다고 약속한 반면 유독 셋째 송부인만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자기 본마음대로 살지못하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뭐가 다르겠냐”고 선뜻 약사발을 들어 들이켰다는 것. 그 약은 그러나 독약이 아니라 보약. 딸들의 기질을 시험하고 길을 들이려던 송질은 이 셋째 딸의 기개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한다.

유감없이 한 세상을 살 그런 기질을 타고 낳던 듯 싶다. 그녀는 평생 세 번 평양(平壤)을 갔다. 처녀때 평안(平安)감사 아버지를 따라, 결혼한 뒤 평안감사 남편을 따라, 세 번째는 늙어서 평안감사 아들을 따라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하제일강산(天下第一江山) 평양의 경치를 구경한 것은 늙어서 아들을 따라가서였다. 처녀 때와 젊은 부인이었을 때는 몸가짐을 조심하느라 집밖을 나가지 않았던 것. 할머니가 되어 세 번째 가서야 가마를 멈추게 하고 “이제는 평양 구경을 해도 욕되지 않을 것이다”며 산천경개를 구경했다.

평안감사 관사별당에는 그녀가 처녀 때 와서 심었던 복숭아와 앵도나무는 그때 고목이 되어 있었다. 송부인은 나무가 이렇게 늙었으니 나는 얼마나 늙었겠느냐고 인생무상을 탄식했는데 이 얘기를 전해들은 중종(中宗)은 이 당대 복덕귀(福德貴)부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특별과거를 베풀고 글제로 ‘三至柳京歎櫻桃樹老(삼지유경탄앵도수로)’ ‘세번 평양에 가서 앵도나무의 늙음을 탄식하다’를 출제했다는 것이다. 남성 위주의 조선사회에서 여성이 존경과 대우를 받은 드문 한편의 가화(佳話)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미국에서 간행된 세계 유명 여류인사 속에 한국여성으론 유일하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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