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디도와 에네아스(Dido and Aeneas)’는 그가 남긴 유일한 오페라이지만, 퍼셀다운 음악의 정수가 오롯이 담겨 있다. 죽음을 앞둔 여왕이 부르는 이별 노래 ‘디도의 애가(When I am laid in earth)’는 소박한 반주와 반복되는 하행 베이스 위에 고요히 체념과 슬픔을 얹는다.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삼키듯 표현하는 이 방식은 오히려 듣는 이의 마음을 더 깊이 파고든다. 그것이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대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이유일 것이다. 단지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가 아니라, 퍼셀만이 쓸 수 있었던 고급스럽고 절제된 감정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퍼셀의 음악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그는 섬세한 선율과 절제된 감정, 정교한 화성 속에 감정을 ‘조용히 심어놓는’ 음악가였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양식의 영향을 받았지만, 퍼셀은 거기에 영국 고유의 정서와 언어 감각, 그리고 자신만의 미학을 덧입혔다. 프랑스 궁정 음악의 장식성과 이탈리아 오페라의 감정 표현을 흡수하면서도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절제미와 고요한 품위를 유지하는 독창적인 음악 언어를 구축했다. 바로 이 ‘퍼셀다움’이 단순한 구조의 아리아인 디도의 애가에 깊은 감정의 울림을 불어넣는다.
퍼셀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오르가니스트이자 왕실의 공식 작곡가로 활동하며 수많은 종교음악과 의전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찬송가는 경건함과 품격을 바탕으로, 인간 내면의 고요한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감정의 흐름과 표현 방식은 그의 전체 음악 세계를 이루는 정서적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오페라라는 장르에서는 종교의 언어로는 담을 수 없는 인간 감정의 깊은 결을 꺼내어 음악으로 표현했다. ‘디도와 에네아스’는 고대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하지만, 퍼셀에게 중요한 건 신화의 형식이 아니라 사랑을 잃는 절망, 버림받은 체념, 남겨진 자의 고요한 죽음이었다. 종교음악의 위로와 믿음 대신, 그는 인간 내면의 슬픔과 고통, 세상과의 이별을 반복되는 선율과 절제된 멜로디로 조용히 직조했다.
“Remember me, but forget my fate.”
(나를 기억해 주세요. 하지만 내 불행은 잊어 주세요.)
디도의 마지막 말은 고통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하면서도, 그 고통만은 지워주길 바라는 품위 있는 절망이다. 그것이 디도의 마지막 4분이 그토록 고요하게 가슴을 파고드는 이유가 아닐까.
어쩌면 이런 바로크 음악은 그가 살았던 17세기보다 지금 시대를 사는 우리의 귀에 더 섬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빠르고 강렬한 자극이 넘치고, 뭐든 쉽게 알고 쉽게 잊히는 이 시대에 퍼셀의 음악은 조용히, 그러나 깊이 스며든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감정을 터뜨리기보다, 정교한 화성과 반복 구조 속에서 그것을 조율하고 절제된 품위 안에 담아내고자 했다. 슬픔은 아름다움을 지녀야 했고, 고통은 음악적 균형 안에서 드러나야 했다. 디도의 마지막 외침은 그런 바로크적 미덕 속에서 태어난 노래이며, 오늘날까지도 그 품격을 잃지 않은 감정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퍼셀의 음악은 그런 고요한 미학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의 멜로디는 듣는 이를 몰아치기보다는 천천히 물들게 하고, 말없는 울림으로 오랜 시간 마음을 흔든다. 퍼셀의 귀하고 오묘한 선율, 장식 없이도 숨 막히게 정제된 오케스트레이션, 그리고 디도의 마지막 외침은 오늘도 300년이 넘는 시간을 지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고요하게, 그리고 깊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