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평균 체류시간 2시간 45분 기록
1인·친구·연인·가족 등 방문객 구성 다채
작가, 직접 경매진행 관객과 거리 좁히고
시민참여·공연 늘려 함께 만드는 축제로
부담 없는 가격부터 고가 작품까지 판매
예술품 구매하며 작가와 소통 기회 선사

햇살이 기울면 공원은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낮에는 그저 산책로이자 쉼터였던 공간이 저녁이 되면 빛과 음악으로 물들고 잔디 위에는 돗자리가 하나둘 늘어난다. 바람에 실려 오는 목재 향이 코끝을 간질이고 무대 위 브라스의 짧은 예열이 귀를 세운다. 아이는 상상아트 놀이터로 달려가고 부모는 아트마켓 부스에서 금속공예 반지를 들여다본다. 샘머리에서 보라매로 이어지는 길목은 그렇게 예술의 장으로 변신한다. 일상이 예술이 되는 곳, 바로 대전서구아트페스티벌(서아페)이다. 지난해 서아페가 남긴 성과와 풍경은 숫자와 장면, 그리고 기억의 결로 증명된다.
◆숫자가 보여준 힘, 지역을 움직이다
지난해 서아페는 7점 만점에 5.95점이라는 만족도를 기록했다. 수치상 변화는 크지 않았지만 재미와 재방문 의사가 높은 점수로 이어진 건 축제가 다시 불러오는 경험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였다. 안내와 편의, 주차까지 무난하게 평가받으며 시민들은 큰 불편 없이 시간을 즐겼다. 지갑이 향한 곳은 추억이었다. 관람객 한 사람당 평균 5만 원 남짓을 쓰며 생활소품과 금속공예품, 작은 그림을 종이봉투에 담아갔다. 가격대는 1~2만 원이 가장 많았다. 부담 없는 소비가 기념이 되고 커피숍과 음식점의 긴 줄은 축제가 지역경제로 스며드는 풍경을 만들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장면도 다양했다. 공식행사와 아트마켓, 체험, 빛터널이 고르게 꼽히며 어느 공간에서든 제 몫의 추억을 남겼다. 해가 기울자 무대 앞은 인산인해로 변했고 돗자리와 장애인석까지 질서 속에서 열기를 더했다.
관람객의 얼굴 역시 다채로웠다. 여성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고 30~50대가 중심이었지만 친구와 연인, 혼자 온 이들까지 고르게 섞였다. 응답자의 70% 이상이 서구민이었지만 외부 방문객도 꾸준히 늘며 축제가 생활권에 뿌리내리면서도 외연을 넓히고 있었다. 오후 3시 공원은 가장 붐볐다. 아이 손에 쥔 기념품, 부모가 들고 있는 커피 한 잔, 삼삼오오 돗자리를 펴는 장면들이 이어졌다. 평균 2시간 45분이라는 체류시간은 그저 스쳐가는 행사가 아니라 머무르며 함께 즐기는 자리였음을 보여준다. 숫자가 전해주는 건 결국 도시의 저녁을 함께 만든 사람들의 풍경이었다.

◆무대와 체험의 확장
무엇보다 지난해 서아페에선 프린지 무대의 완성도가 크게 높아졌다. 꽃 장식과 조명 구조물이 무대의 얼굴을 바꿨고 브라스 밴드·팬플루트·재즈·댄스·벌룬쇼·몽골 전통공연까지 장르가 다채로워졌다. 작가가 직접 무대에 올라 경매를 진행하며 작품과 관객의 거리를 좁혔다. 체험존은 가족 방문객에게 가장 사랑받는 공간이었다. 배틀로봇, 투어기차, 가상현실(VR)·증강현실(AR)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낙서·골판지·상자로 꾸며진 체험 아트는 자연스럽게 포토존으로 이어졌다. 아이가 색연필을 잡는 동안 부모는 옆 부스에서 작품을 살펴보고 그 사이 사진 한 장이 추억과 소비를 동시에 남겼다. 목재친화도시 프로그램도 호응을 얻었다. 목공 놀이터, 목재 퍼즐, 도마·책꽂이 만들기는 산림청 공모 선정의 의미를 몸으로 체험하게 했다.
특히 지난해 서아페의 뚜렷한 변화는 ‘함께’라는 키워드였다. 주무대 맨 앞줄에 휠체어 전용석이 놓였고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 공연은 대형 스크린으로 중계됐다. 공원 한가운데에는 발달장애 작가 13명이 참여한 도넛박스 전시·판매 공간이 마련됐다. 일부 고가 작품까지 판매되며 축제는 포용과 자립의 공간으로 확장됐다. 보여주는 무대를 넘어 함께 만드는 축제로 진화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곧 기억의 색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서아페 포스터의 색감은 현장 곳곳의 아치와 빛터널, 조형물로 번져나갔고 공원 전체가 하나의 브랜드 이미지로 통일됐다. 관람객의 시간은 사진과 굿즈로 남아 오랫동안 되새겨졌다.

◆더 단단해지는 서아페
지난해 서아페의 먹거리 존은 푸드트럭과 비어존이 늘었지만 간편식이 부족하고 어린이 메뉴가 마땅치 않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가격에 대한 부담과 청결 문제도 드러났다. 작은 불편이었지만 그 경험은 곧 올해를 준비하는 출발점이 됐다. 시민들이 어디서, 어떻게 머무르고 싶어 하는지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이 목소리에 맞춰 먹거리 풍경이 크게 달라진다. 공원 곳곳에 배치될 푸드트럭은 간식 판매대를 넘어 다양한 음식과 수제맥주를 담은 작은 미식 축제로 변모한다. 멀리 맛집을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음식과 맥주의 쌉쌀한 향을 공원 잔디 위에서 만날 수 있는 셈이다. 인근 상권과 연결된 배달존은 공원으로 음식을 불러들이고 가족 단위 관람객을 위한 어린이 메뉴도 강화된다. 아이가 먹을 수 있는 따뜻한 식사 한 끼가 채워지면 부모의 발걸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돗자리를 대여해 음악과 함께 즐기는 야간 피크닉장은 또 다른 무대로 확장되고 파라솔 아래 펼쳐진 테이블은 작은 쉼터로 바뀐다. 큼직한 가격표와 정돈된 분리수거 동선까지 더해져 공원은 머무르고 싶은 공간으로 거듭날 준비를 하고 있다.
운영의 변화도 눈에 띈다. 지난해 만족도 조사에서 안전은 6.22점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표지판 부족, 체험존 협소, 공연 차별성 부족은 분명한 과제로 남았다. 올해는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한 장치들이 속속 도입된다. 세대별 맞춤형 무대가 새로 구성되고 작품과 관람객을 이어줄 아트퍼포먼스와 야외 특별 전시전이 곁들여진다. 전용 홈페이지와 새 로고는 안내 체계를 단정하게 정리하고 현장 곳곳에는 다회용기 반납 부스와 통일된 시각물이 자리 잡는다. 친환경과 안전을 동시에 고려한 설계다. 지난해의 불편은 올해 개선으로 이어지며 서아페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시민들을 맞이할 준비를 마치고 있다. 작은 아쉬움이 새로운 기대가 돼 공원 곳곳에서 머무르며 즐길 수 있는 무대와 공간으로 돌아올 시간이다.

◆디테일이 품격을 만든다
2024년 서아페는 단순한 가을 축제가 아니었다. 소외 없는 축제와 관광 연계라는 철학이 무대와 거리, 관람객의 일상 속에서 구현된 시간이었다. 이제 시선은 올해로 향한다. 올해 서아페의 성패는 디테일에서 갈린다. 야간 동선을 어떻게 입체적으로 설계할지, 주무대의 열기를 마켓까지 어떻게 흘려보낼지, 특정 시간에 몰리는 가족 피크를 어떻게 분산시킬지가 관건이다. 안내 체계의 가독성, 간편식 보강과 가격의 신뢰, 굿즈(MD)의 표준화 같은 과제는 실행 항목이 아니라 축제의 품격을 결정짓는 요소다. 공원은 매일 열려 있지만 축제는 며칠뿐이다. 그 며칠을 위해 누군가는 도면 위에 선을 긋고, 조명을 시험하고, 무대 장치를 조립하고, 프로그램 문구를 다듬는다. 관람객이 잠시 스쳐가는 순간을 위해 누군가는 몇 달을 매달린다.
사랑과 관심이 결국 디테일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은 지난해 서아페가 남긴 가장 큰 교훈이다. 가을밤 공원의 불빛이 하나둘 켜지면 사람들은 다시 그 길을 따라 걸을 것이다. 아이는 붓을 손에 쥐고, 부모는 마켓의 반지를 만지작거리고, 연인은 빛터널 아래서 사진을 남길 게다. 그 장면들은 모두 올해 다시 돌아올 것을 약속하는 작은 예고편이다. 축제는 끝나지만 기억은 남고, 기억은 또다시 기대를 부른다. 올해 서아페는 그렇게 이미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