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2일 단 3일, 마법같은 축제 열려
샘머리·보라매공원 공연·전시장으로
어둠 내리면 형형색색 빛 도심 수놓아
공원 곳곳 작은 극장에선 버스킹
예술작품 따라 산책하듯 감상하고
아이들과 깔깔대며 아트체험까지
모두 함께 여행자 되어 즐겨보시길

해가 기울면 도시는 서서히 새로운 얼굴을 드러낸다. 낮 동안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산책객의 발걸음으로 채워졌던 공원은 저녁이 되면 빛과 소리의 무대로 변신한다. 풀잎 위에는 돗자리가 하나둘 펼쳐지고 손에는 간단한 간식과 작은 설렘이 들린다. 무대 위에서 첫 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일상은 잠시 멈추고 모두가 같은 리듬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 특별한 저녁을 위해 2025 대전서구아트페스티벌이 돌아왔다. 10일부터 12일까지 샘머리공원과 보라매공원은 더 이상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다. 도시 전체가 호흡하는 거대한 예술의 광장으로 다시 태어난다. 올해의 캐치프레이즈는 ‘너의 폼을 뽐내봐’다. 누구든 자신만의 리듬과 감각을 들고 나와 공원 속에서 흔들고 웃으며 저마다의 빛을 증명하라는 초대장이다. 가을의 하늘이 조금씩 식어가는 순간 이 초대장은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의 무대 위로 불러 모은다.
◆빛과 음악 스며드는 10월의 공원
△저녁 바람이 올리는 첫 장막
공원의 가을 하늘은 이른 저녁부터 서서히 빛을 거두며 깊어진다. 바람은 사람들의 어깨를 스치고 나뭇잎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노을이 물러나자 공원 가장자리의 전구들이 하나둘 깨어난다. 저편에서는 트럼펫 소리가 음정을 맞추고 아이들이 귀를 막았다가 곧 손뼉을 치며 소리에 적응한다. 이 순간 공원은 일상의 놀이터에서 상상의 극장으로 변한다. 10일 축제의 막이 오르는 첫날은 낮부터 활기를 띤다. 정오가 조금 지나 프린지 무대에선 행복한 우리앙상블이 첫 음을 연주한다. 첼로와 플루트가 빚어내는 선율은 점심 산책객들의 발걸음을 붙잡는다. 잔디에 앉은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유모차를 끌던 젊은 부모는 걸음을 멈춰 아이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음악은 그렇게 일상 깊숙이 스며든다. 잠시 후 보보스클럽이 연주를 시작한다. 재즈와 팝이 뒤섞인 리듬이 공원 위를 활처럼 튕겨 나가고 이어 국제 우호도시 초청공연이 무대를 물들인다. 낯선 언어와 춤사위가 공기를 흔들자 아이들은 금세 리듬을 따라 몸을 흔든다. 세계가 공원 속으로 들어온 듯한 순간이다. 오후가 깊어지면 공원은 런웨이가 된다. 시니어 패션쇼 무대 위로 은빛 머리칼의 모델들이 등장한다. 세월을 담은 옷과 당당한 걸음걸이는 젊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낸다. 주름진 손의 작은 손짓에도 관객은 오래된 시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해가 기울 무렵 한쪽 무대에선 행복한 시낭송 콘서트가 열린다. 시인의 목소리가 노을빛과 겹쳐 공기를 물들이고 시 구절은 바람을 타고 퍼져 나간다. 누군가는 눈을 감고, 누군가는 휴대폰에 적어 남긴다. 공원은 그 순간 시집 한 권이 된다. 오후 7시면 식전공연이 울리고 개막식의 불꽃이 하늘을 가른다. 조명이 공원을 환하게 밝히자 샘머리의 밤이 깨어난다. 이석훈·권진아·프로미스나인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세대를 잇는 선율을 선사한다. 부모와 자녀, 연인과 친구가 함께 손을 흔드는 모습은 거대한 파도처럼 이어진다. 첫날의 밤은 도시의 기억 속에 깊게 새겨진다.
△토요일의 열기, 세대를 묶는 리듬
11일 공원 곳곳은 작은 극장이 된다. 오후 프린지 무대에서 해피바이러스 공연이 열리면 웃음소리가 공원에 퍼진다. 코미디와 마술, 노래가 섞인 무대는 가족 모두의 얼굴에 웃음을 남긴다. 이어 대전사랑메세나 뮤직페스티벌이 무대를 장악한다. 현악 4중주와 합창단의 무대가 이어지며 잔디밭은 작은 콘서트홀이 된다. 기타와 바이올린 선율이 교차하는 순간 관객은 눈을 감고 음악에 몸을 맡긴다. 버스킹 무대는 하루 종일 분주하다. 다섯 팀이 릴레이로 기타와 드럼, 목소리로 공원을 물들이고 관객은 걸음을 멈췄다 이어가며 작은 공연들을 수집한다. 공연은 스탬프처럼 마음에 찍히고 관객은 그것을 모아간다. 메인무대에서는 전국합창경연대회가 열려 수십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웅장한 하모니가 가을 하늘로 퍼져나간다. 지나던 행인도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인다. 이어 프린지 무대에서는 아트퍼포먼스 류현(流絃)이 무대에 오른다. 빠른 손길이 캔버스를 채워가는 순간 관객의 감탄이 터져 나온다. 아트갤러리 경매가 이어져 작은 작품 하나가 새 주인을 만나는 장면도 축제의 특별한 풍경이 된다. 밤이 되면 공원은 절정에 다다른다. 마술사 최현우의 손끝에서 손수건이 비둘기로 변하고 불꽃이 춤추자 아이들은 숨을 죽인다. 어른들은 다시 아이가 된다. 이어 무대는 힙합으로 전환된다. 한요한·래원·김승민이 차례로 등장해 공원을 흔든다. 세대를 넘어선 환호와 손짓이 하늘을 메우며 모두가 같은 리듬 속에 묶인다.
△폐막의 무대, 장엄한 선율의 여운
12일 서아페는 장엄하면서도 따뜻하게 마무리된다. 낮에 프린지 무대의 코튼캔디맨이 시작을 알리고 이어 메인무대에서는 서아페 밴드 경연대회가 열린다. 지역의 숨은 밴드들이 무대 위에서 청춘의 사운드를 증명한다. 오후에는 무대가 더욱 다채로워진다. 크로키키브라더스 드로잉 서커스가 실시간으로 묘기를 선보인다. 아이들은 숨을 죽이고 부모들은 카메라를 들어 순간을 기록한다. 이어지는 로페스타집시밴드와 사운드포켓은 관객의 감각을 다른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저녁 무렵엔 세계합창올림픽 4관왕 쇼콰이어 그룹 하모니아즈가 무대를 채운다. 희망의 노래가 공원 가득 메아리치고 뮤지컬 배우 김보경·바리톤 김동규·DCMF 오케스트라가 성악과 관현악으로 축제의 대미를 장식한다. 웅장한 울림은 관객의 마음에 깊은 메아리로 남는다. 그 순간 공원은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도시 전체의 심장처럼 뛴다.

◆잠시의 머묾이 오래 남는 배움으로
올해 서아페가 내건 목표는 단순하다. 대한민국 대표 문화관광형 축제다. 그러나 그 안에는 많은 층위의 의미가 숨어 있다. 단순히 공연을 보고 지나치는 자리가 아니라 공원에 머물며 배우고 체험하며 도시와 더 깊이 연결되는 시간을 만들겠다는 다짐이다. 눈으로만 보던 그림이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으로 확장되면 전시는 머무는 배움으로 바뀐다. 아이들을 위한 키즈존은 축제를 더 다정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목공을 배우고 작은 삽으로 유물을 발굴하며 과학 체험 속에서 호기심을 발견한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모는 사진을 남기고 그 장면을 다시 추억으로 저장한다. 아이의 웃음과 부모의 눈빛이 겹쳐지는 길은 가족의 기억이 된다. 여기에 지역 대표 빵집들이 참여하는 베이커리존이 마련돼 관람객들이 문화와 함께 맛도 즐길 수 있다. 낮에는 힐링아트체험과 마켓, 버스킹 무대가 공원을 데우고 저녁이 되면 메인무대의 불빛이 공원을 다시 태운다. 곳곳의 프린지 공연, 버블쇼, 명화마임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관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놀이와 학습, 공연과 체험이 맞물리며 하루는 거대한 이야기책처럼 펼쳐진다.
◆깊어진 밤, 공원은 여행자가 된다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아페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야간 체류다. 그 중심에는 아트빛터널이 있다. 관객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공원의 새로운 모습이 펼쳐진다. 단순한 장식이라기 보단 살아 숨 쉬는 전시실이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르겠다. 30일 전부터 설치돼 축제가 끝난 뒤에도 30일 동안 남아 있는 이 터널은 기대와 여운을 한 달 넘게 이어가는 장치다. 밤이 되면 공원은 여행의 얼굴을 띤다. 낮에 아이가 만들던 목공 도마가 조명을 받아 그림자가 되고 과학 실험에서 남긴 흔적이 또 다른 전시물이 된다. 아이들의 낙서는 포토존으로 다시 태어나고 부모의 미소가 그 옆에 빛처럼 겹쳐진다. 공원 밖으로도 여정은 뻗어 나간다. 대전시립미술관, 이응노미술관, 대전예술의전당, 대전시립연정국악원으로 이어지는 서구아트투어는 도시의 문화시설을 엮고 전통시장과 골목 명소까지 끌어안는다. 외국인 관광객도 이 동선 속에서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무대로 경험한다. 서구청 광장으로 확장된 먹거리존은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음악과 함께 즐기는 밤의 식탁이 된다. 배달존은 인근 상권을 살리고, 파라솔과 다회용기는 오래 머물고 싶은 환경을 만든다. 공원은 이제 머물고 싶은 여행지가 된다.

◆불빛 따라 걷다 보면 시장도 예술이 된다
서아페의 힘은 결국 지역과 함께할 때 배가된다. 서구는 올해 축제를 지역 경제의 강력한 자석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전통시장과 상권이 연계되고 배달존이 새로운 소비 동선을 만들어낸다. 골목의 작은 가게들이 축제의 불빛과 연결되면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장터이자 무대로 변신한다. 아트마켓과 프리마켓은 예술 소비의 문턱을 낮춘다. 값비싼 작품이 아니어도 작은 수공예품 하나쯤은 누구나 가방에 담아갈 수 있다. 그렇게 예술은 나눔으로 자리 잡는다. 아트갤러리 경매는 작품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관객이 구매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도록 다리를 놓는다. 홍보 역시 달라졌다. 새 로고와 전용 홈페이지는 축제의 얼굴을 통일했고 SNS와 온라인 채널은 공유하고 싶은 이미지를 퍼뜨린다. 서아페가 끝난 뒤에도 사진과 굿즈는 도시의 얼굴을 오래 기억하게 한다. 예술은 무대에서 멈추지 않고 골목의 불빛, 시장의 향기와 뒤섞여 더 넓게 퍼져간다.
◆세심함이 만들어낸 축제의 깊이
서아페는 오래전부터 소외 없는 축제를 꾸준히 지향해왔다. 올해도 그 철학은 이어진다. 휠체어석, 발달장애인 공연, 장애인 작가 전시·판매 공간은 모두가 함께 무대를 만들도록 한다. 축제는 누가 보느냐가 아니라 누가 함께하느냐로 완성된다. 안전 또한 빠질 수 없다. 다회용기 전면 사용, 분리수거 동선 정비, 배달존 운영 같은 작은 디테일까지 모두 서아페의 철학을 생활 속에서 구현한다. 작은 손길이 모여 축제는 더 단단해진다. 축제를 만든다는 건 결국 누군가의 시간을 설계하는 일이다. 공원을 걷는 순간부터 작품 앞에서 멈칫하는 눈빛, 떠날 때 가방 속에 남는 작은 굿즈까지 그 모든 게 하나의 기억으로 이어지고, 그 기억이 도시를 다시 빛나게 한다.
◆에필로그 : 가을밤의 등불
올가을 샘머리와 보라매에 불이 켜질 때 그 빛은 단순히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아니다. 전구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얼굴을 밝혀주고 그 빛이 스며든 눈빛마다 서로를 알아보는 따뜻한 신호가 된다. 누군가는 오랜만에 친구와 나란히 걷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아이 손을 잡고 이 길을 걷는다. 불빛은 그 모두의 발걸음을 감싸며 도시의 심장을 고르게 뛰게 한다. 공원은 매일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만 서아페의 사흘은 다른 시간이다. 매일 걷던 길이 새로운 무대가 되고, 매일 지나치던 나무가 반짝이는 장식이 된다. 그 짧은 사흘 동안만큼은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조금 더 천천히 바라본다. 노을에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고 불빛 아래 드리운 그림자를 따라 걸으며 우리는 일상과 비일상이 겹쳐지는 순간을 살아간다. 빛은 눈을 비추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음을 흔든다. 잔디 위 돗자리에 앉아 바라본 무대의 조명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별처럼 박힌다. 음악은 다시 우리를 불러 세우고 낯선 사람의 웃음소리마저 내 곁의 멜로디가 된다. 서아페의 끝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은 자리를 쉽게 떠나지 못한다. 마지막 곡이 울려 퍼지고 불꽃이 하늘을 밝히는 순간 모두는 알고 있다. 축제는 사흘 뿐이고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돌아온다는 사실을. 너의 폼을 뽐내보라는 이 말은 단순한 구호라고만 생각할 수 없다. 공원에 발을 디딘 모두에게 주어진 약속이다. 누군가는 춤으로, 누군가는 작은 작품을 손에 쥠으로, 또 다른 이는 노래를 따라 부름으로 그 약속을 지킨다. 사흘의 시간이 지나고 일상이 돌아와도 가을밤의 빛은 오래 남는다. 사진 속에서, 기억 속에서, 혹은 벤치 위의 잔향처럼 남아 도시에 스며든다. 축제는 끝나도 이야기는 남고 내년 우리는 다시 그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같은 자리로 모일 것이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