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구간 충암누리길 & 흥진마을길

최근 들어 기후위기에 대한 체감도가 부쩍 커졌다. 계절에 맞지 않는 ‘이상한 날씨’를 경험하게 되는 게 예년에 비해 더 많아졌다는 의미다. 지난해까지 2년 연속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지구적 연평균기온이 역대 최고치를 갈아치웠고 올해만 해도 이른 더위에 초가을 추위까지 계절을 무색케 할 정도로 확연한 이상기온 현상이 나타났다.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변화는 역시 지구온난화다.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가 지구 대기에 더 넓고 두텁게 쌓이면서 열기가 지구 밖으로 방출되지 못하고 그 여파로 대기 순환에 이상한 흐름이 형성돼 ‘이상한 날씨’, 더 나아가 ‘이상기후’가 점차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 잡는다는 게 현재까지의 정설이다. 물론 날씨는 ‘신(神)의 영역’이라 불릴 정도로 복잡·다양한 요소들이 얽히고설켜 있어 가늠하거나 예측하기 어렵지만 우리 모두가 인정하는 분명한 진실은 하나 있다. 바로 지금의 기후위기는 문명을 향한 인간의 이기주의에 의해 촉발됐다는 거다. 전세계 주요 국가·석학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지금처럼 온실가스를 마구 뿜어냈다간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탄소배출 제로화’를 글로벌 어젠다로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권고하고 있지만 사회적 논쟁은 여전하다.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기후변화가 천문학적인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기후위기로 악화된 지금, 미래 세대를 위한 현명한 선택에 중지가 모아지길 기대해 보면서 대청호오백리길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 가을 대청호의 진리, 흥진마을길

뭘 해도 좋은 계절이지만 왠지, 마냥 슬픈 계절이다. 서늘한 바람에 따스한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안으며 일년에 며칠 안 되는 여유로운 한 때를 보내보지만 이 계절, 가을의 풍경은 쓸쓸하기만 하다. 형형색색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단풍은 우리를 설레게 하지만 전반적인 가을의 느낌이 그렇다는 거다.

그도 그럴 게 가을은 자연의 생명이 저물어가는 시점이다. 단풍 역시 겉으론 화려하고 황홀한 빛깔을 자랑하지만 신록으로 태어나 초록으로 생명의 정점을 찍은 나뭇잎이 그 생명력을 다한 것이 바로 단풍의 이면이다. 겨울이 오고, 찬바람 더 세게 불면 낙엽이 돼 흙으로 되돌아가겠지.

단풍이 절정을 이룬 지난 주말, 대청호오백리길에 또다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 이 질문엔 망설임은 없었고 주저할 틈도 없었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만추(晩秋), 힐링을 위한 선택이라면 물어볼 것도 없이 오백리길 5구간, 흥진마을길이다. 10년의 오백리길 경험에서 자연스럽게 ‘가을엔 흥진마을길이지’라면서 몸이 먼저 반응한다. 이례적인 가뭄에 담수된 물이 크게 줄면서 대청호반의 지형까지 바뀌었던 2015년의 기억이 뇌리에 뚜렷하게 박힌 탓이다. 그해 흥진마을은 예쁜 단풍에 새하얀 억새의 물결이 넘실대던, 입이 떡하니 벌어지는, 말 그대로 동화 속 풍경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 황홀했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물이 꽉 들어차 그때의 운치와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명불허전, 따사로운 햇빛, 시원한 바람에 반짝이는 새하연 억새의 향연 가득한 흥진마을길은 여전히 가을 대청호의 진리다.

◆ ‘충암 누리길’ 한 바퀴

잘 정비된 벚꽃한터(주차장)에서 초콜릿색 만추의 여정을 시작한다. 어느새 대청호에도 가을이 내려앉았다. 충암 김정 선생 유적지를 중심으로 새로 조성된 ‘충암 누리길’을 걷는 것으로 워밍업을 한다. 고풍스러운 고택과 아름다운 대청호의 수변 경관이 어우러지도록 호반을 따라 데크길이 조성됐는데 숲내음이 은은하게 퍼지는 가운데 펼쳐지는 고즈넉한 분위기와 공간미가 돋보인다. 천천히 걸으며 사색에 잠기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힐링의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쉬엄쉬엄 15분 정도면 한 바퀴를 다 돌아볼 수 있다.

충암(冲庵) 김정(金淨, 1486∼1521) 선생은 사림의 이상을 추구하며 조광조 등과 함께 개혁운동을 이끌었다가 기묘사화의 희생양이 된 인물로 기록돼 있다.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의 지지를 바탕으로 훈구파와의 대립 속에서 개혁정책들을 힘있게 추진했지만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급진적인 개혁 탓에 거센 반발에 부딪쳤다. 1519년 금산에 유배된 김정은 이듬해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안치됐고 1521년 사약을 받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성균관과 전국의 유생을 중심으로 김정·조광조를 비롯한 기묘명현에 대한 명예회복 요구가 이어졌고 1545년 인종의 유언으로 관직 회복과 함께 신원이 이뤄졌다. 이후 1758년(영조 34년) 영의정에 추증됨으로써 완전히 복권됐다. 불천위(不遷位) 서훈까지 받았으니 그의 덕망과 국가에 대한 헌신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김정 선생의 묘역 동편의 대문에 들어서면 우측에 종택(宗宅)이 자리잡고 있고 종택의 뒤편 조금 높은 곳에는 별묘가 있다. 별묘 동북쪽으로 김정 선생의 부인인 은진송씨 열녀정려각이 있는데 송씨는 오백리길 3구간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쌍청당 송유의 현손녀다. 별묘의 서편엔 강당(講堂)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제향을 올리는 재실로 사용되는 산해당(山海堂)이 있다.

◆ 다시 흥진마을길 한 바퀴

충암 누리길을 돌아나와 바깥아감마을 벚꽃한터에서 다시 흥진마을로 진입한다. 흥진마을길 역시 원점회귀가 가능하다. 충암 누리길보단 한참 더 길다. 토끼봉을 중심으로 한 바퀴 삥 돌아나오게 되는데 대청호의 장관에 취해 자주 발길이 멈추지만 그래도 1시간 정도면 족하다.

이곳은 봄이면 세상에서 가장 긴 벚꽃길이 펼쳐지는 곳으로 더 유명하다. 벚꽃이 만개할 때면 이 일대는 상춘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가을에도 이곳은 가을대로의 멋이 있다. 나름 화려하면서도 시치스럽지 않은 화이불치(華而不侈)의 멋이 살아 있다. 5구간의 끝자락인 방축골이 카페의 감성과 맞닿아 있다면 시작점인 이곳은 자연주의 감성을 자극한다.

가을철 흥진마을길의 포인트는 단연 새하얀 솜털 흩날리는 억새와 다소 투박하지만 가을색이 더 강렬한 갈대의 향연이다. 억새와 갈대의 장관은 그냥 바라보는 것, 그 자체로 힐링의 원천이 되지만 잔잔한 호수가 또 한 번 담아낸 가을 이미지는 말이 필요없이 그저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유유자적 자연이 선사하는 충전 에너지를 온몸으로 흡수하며 꿈같은 가을풍경, 그 추억 한 컷을 마음에 새기면 바쁜 세상살이에 무뎌졌던 ‘행복 세포’가 깨어나고 비로소 궁극의 힐링을 맞이하게 된다.

◆ 5구간의 신상 수변공원

5구간에도 ‘핫 플레이스’ 등극이 예상되는 수변공원이 탄생했다. 대청호오백리길 4구간의 시그니처라고 할 수 있는 명상정원의 뒤를 이어 5구간도 생태관광 명소로서의 입지가 갖춰지는 모양새다.

최근 공개된 신상동 수변공원은 금강유역환경청이 금강유역수계기금을 활용해 대전 동구, 한국수자원공사(K-water) 등과 함께 추진한 통합형 수변생태벨트 조성사업의 결과물이다. 이 마을을 관통하는 신상천을 중심으로 조성됐는데 그 넓이가 7만㎡에 이른다. 신상천을 통해 흐르는 물이 이 수변공원에서 자연정화의 과정을 거쳐 대청호로 유입된다. 공원이 조성되기 전 이곳은 농업폐기물이 방치되고 생태계 교란식물이 무성하게 번식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 2021년부터 긴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비가 많이 내렸을 때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댐 홍수터와 연계해 아름다운 정원으로 재탄생했다.

수변공원은 기존 물억새습지와 자연초지, 수변정화림, 수변초지, 정화습지, 경관초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수변정화림과 수변초지엔 물푸레나무, 갈대, 수크령 등 정화능력을 지닌 식물들이 식재돼 있고 정화습지엔 큰고랭이, 꽃창포, 부들 등 수질정화에 탁월한 식물들이 식재돼 있다. 이곳에서 침전, 여과, 흡착, 미생물 분해과정을 거쳐 오염물질이 제거된 깨끗한 물이 대청호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경관초지에선 5∼7월엔 꿀풀, 6∼8월엔 원추리, 7∼9월엔 배초향, 9∼10월엔 구절초를 감상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이기준 기자 lkj@ggilbo.com
사진=차철호·김동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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