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여전' 송기태·현숙 부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송수는 광주이씨 광원군 이극돈(1435~1503)의 사위로 장인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는데, 이극돈이 생전에 사위를 자기 곁에 묻어달라고 해서 이극돈의 묘 옆에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부인 이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친정 근처에 살면서 아들 넷을 잘 키워 성공시켰다.
송수의 뒤를 이어 상대원에 세거한 송씨는 송수의 3남인 송말경(宋末璟)의 후손인데, 송말경의 손자 송언신(宋言愼, 1542~1612)은 퇴계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직전 평양감사를 역임하는 등 5도관찰사(종2품 감사)와 의정부 좌참찬(정2품), 지중추부사(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2품), 이조판서(정2품장관) 등 요직을 역임하면서 당쟁에서 서인을 많이 공격했으며 광해군 초에 축출됐다. 송호범(宋鎬範,1 930년생)은 송말경의 17대손이다.
송수의 장남 송맹경(宋孟璟)은 중추부사(왕명을 출납하던 중추부의 정3품)와 오위도총부부총관(종2품)을 지냈고, 송숙경(宋叔璟)은 첨정(4품)과 왕자사부(王子師傅: 왕자의 교육을 맡았던 종9품), 송말경은 양천현령(종5품 수령), 송범경(宋範璟)은 주부(정6품)를 지냈다.
또 손자 송희민(宋希敏)은 한성부좌윤(종2품 서울시부시장), 송희성(宋希聖)은 의금부도사(종5품), 송율(宋嵂)은 종성부사(정3품수령), 송윤(宋崙)은 창녕현감(종6품수령), 송입(宋岦)은 부사과(副司果: 조선때 오위(五衛)의 종6품 관직으로 관계상(官階上)으로는 여절(勵節)·병절교위(秉節校尉)라 별칭됐고, 태종때는 섭부사직(攝副司直)이라 하였음)를 지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조용히 실천해온 경기도 안성 옥산동에 세거하던 여산송씨 송기태는 선고(부친)의 유업을 이어온 효자로 알려져 있다.
한국이 산업화로 접어들던 50년대부터 영농을 해가며 4남 1녀를 서울로 보내 공부시켰으며,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여산송씨인이었다.
특히 한국전쟁에 참전, 전쟁사에 남아 있는 금화지구 전투의 숨은 영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송기태는 참전용사로써 국가의 보상도 거절했고, 국민으로서 당연히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참전했고 더구나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마당에 나홀로 참전 용사대우를 받을 수 없다며 끝내 보상도 거절한 채 사망할 때까지 몸속에 총탄이 박힌채로 살아왔다고 하며, 오히려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찾아 다니며 그들 몰래 양식 등을 나눠줘 왔다고 한다.
송기태의 이런 선행을 어려서 부터 보아온 막내딸 송현숙(宋鉉淑)도 아버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며 살고있다.
송기태가 세상을 달리했을때 그의 도움의 손길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여산송씨 가문은 선조들의 유훈을 받들어 ‘형제간의 화목’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
송기태의 이런 선행을 어려서부터 보아온 막내딸 송현숙의 아버지 닮음은 송현숙에 의해 대(代)를 이어 전승되고 있다.
연세대학교 재단에 취직해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통큰 자선적(自善的)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다.
연세대 재단에 근무할때 한번은 송현숙의 집에 주변 사람이 찾아와 잠시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도벽근성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편안하게 대해줬으나, 역시 그의 도벽 근성은 어쩔 수 없어 끝내 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나 지금도 관대하게 모르는 척하고 있기도 하다.
부친 송기태의 가르침속에 지금도 송현숙은 자신이 땀 흘리지 않은 조상의 유산에 욕심내지 말 것, 형제의 우애조차 조상 유산에 대한 탐욕으로 의(義)를 저버리는 죄악을 저지르지 말 것, 항상 독서를 통해 내자신을 일깨울 것, 자신의 못된 행동에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은 가차없이 들춰내는 못된 사람이 되지 말 것, ‘남한테 베푸는데 인색하고, 받기만 해 본 파렴치한 사람이 되지 말라’는 가훈(家訓)을 간직하며 사회적 기업인의 아내로 또는 주역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