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대표 토성 ··· 조선 지리지서도 먼저 등장

토성(土姓)은 그 지역의 영토를 뜻하는 토(土)와 성씨를 뜻하는 성(姓)이 합쳐진 말로 그 지방에 토착하면서 그곳 지명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 집단을 말한다.

토성은 그 지역의 읍사(邑司)를 구성하는 지배 세력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그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친족 집단이라 할 수 있다.

토성이라는 용어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가 편찬되던 15세기까지도 널리 쓰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 공주목(牧) 성씨조(條)에는 “토성(土姓)이 7이니, 이(李), 정(鄭), 송(宋), 박(朴), 황(黃), 고(高), 임(任)”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들은 모두 공주을 관향으로 하는 공주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인데, 현재는 공주이씨(공산)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자취가 남아 있지 않다. 공주의 대표적인 토성이 공주이씨다. 공주이씨는 공산이씨(公山李氏)라고도 하는데, 세종실록지리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 조선 전기 지리지의 공주 성씨조에 가장 먼저 등장할 정도로 큰 성씨이다.

공숙공파 파조 이명덕 영정과 공주시 월송동 금강변의 명탄서원 전경
현재 공주시 월송동에는 고려 말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멸망한 고려왕조에 절의를 지킨 문성공(文成公) 이명성(李明誠)의 충절과 그의 동생 이명덕(李明德)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절사(忠節祠, 명탄서원)가 남아 있다.

이 외에도 공주의 외촌성(外村姓)으로는 황(黃), 백(白), 하(河) 세 성씨가 있었고, 당나라에서 귀화한 성씨로 김(金)씨가 있었으며, 공주의 속현이었던 신풍현과 유성현, 이미 사라지고 없는 향소부곡의 성도 기록에 보인다.

고려시대 공주에 속했던 신풍현은 현재 공주시 신풍면 일대 지역으로, 신풍현의 토성으로는 백(白), 박(朴)씨가 있으며, 신풍현 망성(亡姓)으로는 최(崔), 신(申), 촌성(村姓)으로 현(玄)이다.

없어진 완부, 귀지(貴知) 2개 부곡(部曲)의 성씨로 유(兪)씨가 있으며,유구역(維鳩驛)의 성씨로 최(崔)씨가 있었음이 기록돼 있다.<출처-향토대전보충>

명탄서원-공주시 월송동 210번지(문화재자료 제70호) 사송정 마을에 자리한 여말선초의 학자 이명성과 이명덕의 학행과 충절, 덕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서원
1396년(태조 5) 사봉(沙峰) 이명덕(李明德)은 생원(生員)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 3년마다보던 정기과거)에 급제, 대사헌(大司憲, 백관을 규찰하던 사헌부의 수장, 종2품 검찰총장), 동지총제를 거쳐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왕명을 출납하던 중추원의 종1품 재신)에 승진하고 궤장(70세 이상의 연로한 대신들에게 하사한 안석(案席 :앉을 때 몸을 기대는 방석)과 지팡이)을 하사받았다.

이명덕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해 대승(大勝)한 이천장(李天章)이 있고, 임진왜란 때 부산이 위급함을 알고 출전, 순절해 부산 충절사에 제향된 이연헌(李延憲) 등이 이름을 알리고 있다.

공주향교의 문서에는 공산이씨들이 전 시기에 걸쳐 다수 등재돼 있으며, 특히 공주 공산성 내의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에도 공산이씨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공주 지역의 대표 성씨로, 유력한 사족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1851년(철종 2) 명탄서원을 중건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현재 명탄서원의 아랫동네인 공주시 월송동에 동족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저작권자 © 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