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때 정절을 지킨 열녀 공산이씨
역사에 기록된 인물로는 경력공파(經歷公派) 이명선(李明善)의 10세손 이기수(李麒壽)와 이붕수(李鵬壽:1548~1593)형제가 임진왜란때 정문부(鄭文孚: 정문부의 전승기념비 ‘북관대첩비’를 일제가 일본으로 가져갔던 것을 2005년 김원웅 의원 등이 약 100년만에 반환해 옴)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옥탑평(玉塔平)싸움에서 순절(殉節: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림)하여 형은 부제학(副提學:홍문관 정3품), 아우는 지평(持平:정5품)에 추증됐다.
이붕수는 임란이 일어나자, 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 정문부(鄭文孚)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별장(別將: 용호영의 종2품, 또는 용호영 이외의 각 영의 정3품, 조선전기에는 정7품)이 돼 부령(富寧)을 수복하고, 반역자 국경인(鞠景仁, 선조의 아들(왕자)을 왜군에 넘겨줌) 등을 처형했다. 왜란 중 육지에서 처음으로 적군을 격퇴한 이 승리를 기리기 위해 1709년(숙종 35년) 함북 길주(吉州) 임명리(臨溟里)에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세워졌다.
이어 길주와 단천(端川) 등지에서도 승리했고, 이듬해 패퇴하는 왜적을 추격해 옥탑평(玉塔坪)에서 싸우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전사했다.
1666년(현종 7) 사헌부지평(持平: 5품)에 추증됐다가 후에 사헌부감찰(監察: 백관을 규찰하던 정6품 검사)에 증직됐었다. 경성(鏡城)의 창렬사(彰烈祠)에 배향됐다.
이원배(李元培)는 이명선(李名善)의 18세손으로 경서(經書: 성현들이 유교의 사상과 교리를 써 놓은 서적)와 학행(學行)으로 명성을 날렸다고 하며, 정조 임금 앞에서 구경(九經) 질문 62조를 서슴없이 답변하여 많은 포상을 받고 벼슬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고 한다.
강양공파 이부(李敷)는 조선개국 3등공신으로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11세손 이도(李棹)가 숙종때 부총관(副摠管:오위도총부의 종2품)을 지냈다.

열녀 공산이씨는 이장백(李長白)의 딸이며, 남편은 미촌(美村) 윤선거(尹宣擧)로서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윤선거 처 공주이씨는 윤선거에게 시집을 와서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신을 했다. 청군의 공격으로 강화도가 함락되고 포로로 잡힐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자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교하(交河)에 있다.
1681년(숙종 7)에 명정이 내려져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 윤증(尹拯) 고택 진입로 입구 쪽 길가에 정려가 세워져 있다.
정려각의 명정 현판에는 ‘열녀고징사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겸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세자사시문경공윤선거지처증정경부인공주이씨지려(烈女故徵士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諡文敬公尹宣擧之妻贈貞敬夫人公州李氏之閭)’라고 쓰여 있다.<출처-향토대전>
이밖에 3·1운동 민족대표인 이필주(李弼炷)와 지평공파 이명보(李明保)의 14세손 이동발(李東發)은 철종때 우부승지(右副承旨: 승정원의 정3품 당상관)를 지냈다.
참의공파 이명윤(李明尹)의 13세손 이응거(李膺擧)는 정조때 한성부판윤(判尹: 정2품 서울특별시장)을 지내 이름을 떨쳤으며, 현감공파 이명의(李名義)의 18세손 이병덕(李秉德)은 순조때 현감(縣監: 종6품 수령)을 역임해 공주이씨(公州李氏)를 빛냈다.
